2022. 10. 10. 07:27ㆍ땅의 기감학/크나이프 신부의 경험
크나이프(Sebastian Kneipp) 신부의 경험
Mayer/winklbaur, Wuenschelrutenpraxis, Orac, 1985, Wien, p.90-93
"크나이프 신부는 각탕(脚湯)과 물을 사용한 치료법으로 알려진 사람이다. 그러나 크나이프 씨가 정말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병을 치료하는 것이 아닌 생활의 규준에 따라 살아가는 것, 즉 건강을 유지하도록 도와주는 예방 의학적 방법에 대한 것이었다.
크나이프 신부로서는 당연하게 생각했겠지만, 오늘날은 누구도 더 이상 주목하지 않는, 누구나 자신의 건강은 첫 번 째로 자기 자신이 책임을 지고 돌봐야 하는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그의 기독교적인 세계관의 관점으로 보면 인간의 삶과 건강은 모두 신에게 맡겨진 재산으로 잘 관리하여야 하는 것이었다.
현재는 대부분 사람들은 이것과는 반대로 생각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즐거움을 추구하는 삶을 살고 있다. 자신의 즐거움을 제한하지 않고 쾌락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결과로 육체에 병이 나타나면, 이 육체는 마치 고장난 차가 자동차 수리 기술자에게서 고쳐지듯이 병원의 의사에게 넘겨진다. 그리고 병원의 치료비는 의료 보험 조합에서 지불을 한다.
그는 사람들이 합리적인 방법으로 즐겁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줄려고 했다. 그는 금욕주의자도 아니었고, 그의 책 “크나이프, 물을 이용한 치료”을 읽어보면 그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은 물을 이용한 치료가 아닌 다른 것이었다.
그는 물만을 말한 것이 아니라 건강한 생활을 위한 5 개의 중요한 원칙을 확립하였던 것이다.
1. 물을 사용
2. 약초를 사용(무엇보다도 약초 차)
3. 바른 식생활
4. 운동과 바른 호흡
5. 종교 생활(이것을 내적인, 조화로운 삶의 질서라고 말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크나이프 신부는 6 번째의 중요한 원칙을 잊어 버렸다.
크나이프 신부의 물을 이용한 치료법이 좋은 효과를 가지고 사람들의 건강 유지에 도움을 주었다면 그는 무엇 때문에 죽었는가? 그는 76 살까지 살았고, 그의 건강법이 옳다는 것이 증명이 되었고, 그의 사인이 라디에스테지(기감학, 氣感學)의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는 암으로 죽었다. 그는 방광 상부에 종양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1821 년 태어나 1855 년에 뵈리스호펜(Woerishofen)에서 부제로 그리고 도미니코 수녀원의 고해 신부가 되었다. 1833 년 주임 신부가 죽자 그는 주임 신부의 자리를 이어서 주임 신부가 되었다. 1896 년까지 그는 한번도 아픈 적이 없었고, 1897 년에 죽었다.
1896 - 1897 년의 겨울에 그의 방광에 문제가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1897 년 3 월 8 일 그는 생전 처음으로 피곤하고 힘이 없는 것을 느꼈고, 오전부터 자신의 침대에 눕게 되었다. 다음 날 의사가 진찰을 했고, 그 다음날 그는 정신을 잃었다. 그리하여 그의 임종 과정이 시작되었다.
그는 수도원으로 옮겨져서 간호를 받게 되었다. 수도원으로 옮긴 다음 날부터 양쪽 다리에서 통증이 왔고, 5 월 3 일에는 자신이 더 이상 나을 수 없다고 말했고, 2 주 후인 5 월 16 일에는 자신의 건강법 중에 무엇인가 중요한 내용이 빠져 있다는 것을 말하였다. 즉, 그가 누워 있는 침대에서 더 이상 누워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참을 수 없다고 말했다.
수녀들이 그를 침대 양쪽에서 간호할 수 있도록, 지금까지 침대의 한쪽 면이 벽 쪽에 위치해 있던 침대를, 침대의 머리 부분이 벽 쪽으로 향하게 침대 위치를 옮겨 놓았다. 다음 날 그는 약해진 상태에서 옆방으로 침대를 옮기게 되었고, 의사가 놀랄 정도로 기력을 회복하였다.
5 월 말 그는 이전의 방으로 가고 싶다고 하여 그가 있던 침대 자리로 되돌아 왔다. 침대를 옮긴 3 일 후부터 그는 다시 나빠지기 시작했다. 6 월 17 일 목요일 아침에 그는 죽은 채로 그의 침대에서 발견되었다. 다음날 시신이 부검되었다. 그는 방광암을 가지고 있었고, 복막에 염증이 있었고, 심장과 콩팥과 폐에도 염증이 있었다. 그의 병에 대한 서류는 바트 뵈리스호펜(Bad Woerishofen)에 위치한 크나이프 박물관에 있고, 누구나 볼 수는 없다.
라디에스테지 능력자인 어느 고등학교 교사가 크나이프 씨의 병력을 조사하여 크나이프 씨가 어떤 침대에 누워 있었는가를 연구하였다. 그 교사는 라디에스테지 방법으로 기감봉과 기감추를 사용하지 않고 지검전기(地檢電器, Geoelektroskop)라고 부르는 저항기를 사용하였다.
이 기계는 인체의 특정한 부위의 저항을 측정하는 기계로 40 - 50 킬로 오옴은 보통의 자리, 70 - 120 킬로 오옴은 심한 병을 유발하는 자리로, 140 - 150 킬로 오옴은 암에 걸린 사람이 발견된 자리, 180 - 200 킬로 오옴은 항상 이 자리는 암에 걸리는 자리 등으로 측정자의 몸의 저항이 측정되었다.
크나이프 씨가 임종한 침대는 50 킬로 오옴 보다 낮은 측정치가 나온 곳이 한 곳도 없었고, 원래의 침대 자리는 200 킬로 오옴의 측정치가 나왔다. 크나이프 씨는 사제관에서 나쁜 자리에 침대가 놓여 있었고, 그리고 수도원에서도 역시 나쁜 자리에 침대가 위치해 있었다.
오늘날 크나이프 씨의 침대가 놓여 있던 자리에 아무도 자지 않는다. 그러나 수녀원의 역사책을 보면 크나이프 씨가 임종했던 방에 그의 사후에 다른 수녀가 살다가 위암으로 죽었다.
크나이프 씨는 건강의 6 번 째 요소를 몰랐던 것이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자우어브루흐 교수의 침묵
Willi H. Gruen, Erdstrahlen, unheimliche Kraft oder bluehender Bloedsinn?, (Ullstein Sachbuch, Frankfurt am Main, 1986), p.48-49
"자우어브루흐(Ferdinand Sauerbruch) 씨가 취리히(Zuerich)의 주립 병원에서 의사로 있을 때 3 건의 의문사(疑問死)한 환자에 대하여 침묵을 지켜야만 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 간격을 두고 모두 같은 방에서 같은 침대를 사용한 3 명의 간호사가 유방암으로 사망하였다. 그는 당시에 땅의 나쁜 영향이 이 사건과 무슨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의혹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기감 전문가를 초청하여 간호사들이 암에 걸렸던 방을 조사하였던 것이었다.
그 기감 전문가는 간호사들이 잤었던 침대의 상부에 정확히 2 개의 지하 수맥이 겹쳐지는 자리라는 것을 기감 조사하였다. 왜 자우어브루흐 씨는 이 비극적인 일에 대하여 숨겼는 지 궁금할 것이다.
그가 지하 수맥의 유해 지기의 교차점이 암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론에 찬성한다고 동료 의사들이 그를 비웃음거리로 만들까 두려웠던 것일까?
벌써 의학자들은 새로운 생각이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힘드는 것인가를 알고 있었다. 산욕열(産褥熱)의 발견자이며 수 천명의 부인들의 생명을 구한 비인 출신의 젊은 의사인 제멜바이스(Ignaz Philipp Semmelweis) 씨도 동료 의사들에게 왕따를 당했다.
그는 산욕에 걸린 부인을 진료하고 소독하지 않은 의사로부터 치료를 받은 젊은 산모들이 특별히 사망률이 높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그는 직설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으로 동료 의사들에게 환자를 진료하고 나서 최소한 양손을 소독약 통에 담구라는 말을 하게 되었다. 젊은 산모들의 사망률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쇼펜하우어(Schopenhauer) 씨는 모든 새로운 발견은 3 단계를 거친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에는 그것은 비웃음을 당하고, 그러고 나서 논쟁이 일어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왜 그것을 이전에는 몰랐던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자우어브루흐 씨는 나중에 베를린의 세계적으로 유명한 자선 병원의 의사가 되었을 때, 새로 수술한 환자에게 “환자가 암에 걸리게 된 침대 자리에 절대로 다시 침대 자리를 정하지 말라” 라고 충고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