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9. 09:06ㆍ기감학/기감학의 역사
라디에스테지-기감학의 역사
인류는 유구한 세월동안 지구상에 살면서 자연의 섭리를 연구하였고, 그것을 따름으로서 건강장수(健康長壽) 부귀영화(富貴榮華)를 이루기 위하여 노력해왔다. 극동 아시아에서는 기원전 4,000 - 3,000 년경에 벌써 풍수(風水) 체계가 만들어졌고, 기원전 13 세기경에 주역(周易)이라는 학문 체계가 성립되었다.
서양에서는 기원전 14 세기 고대 그리스인들이 기감(氣感)의 원리를 이용하였던 역사적 사실이 있었고, 기원전 3,000 - 300 년 고대 이집트 파라오의 무덤 부장품(副葬品) 중에는 기감추가 있었고, 조각상이나 그림에는 기감봉을 들고 있는 제관(祭官)들이 있었다. 유럽에서는 보통 사람이 가지지 않은 예민한 감각을 가진 사람들의 경험이 후세(後世)로 전수되다가 19 세기부터 그들이 지각(知覺)하고 있는 미지(未知)의 미세 에너지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연구가 되기 시작하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민한 사람들이 지각하고 있던 미세 에너지를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렀지만 그들은 같은 대상을 각자의 방법으로 연구했다고 볼 수 있고, ‘기공(氣功)’이라는 의미는 기(氣)를 연구(硏究)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고대 중국에서는 수신(修身)의 도(道)에서부터 도교 내단파(內丹派), 오금희(五禽戱), 팔단금(八段錦), 태극권(太極券) 등의 기공이라고 명명(命名)되기 이전의 수많은 수련(修練) 방법이 있었고, 1950년대에 와서 기공(氣功)이라는 말이 심신건강(心身健康)을 위한 양생술(養生術)로 중국 전통의학(中國傳統醫學)의 한 치료 방법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박문현, 주역(周易)과 기공(氣功), p.1, 한국정신과학학회지(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JUNGSHIN science), 제4권 제2호 2000.12.)
유럽에서는 극동 아시아 지역과는 다른 역사적인 과정으로 기공이 발전하게 된다. 유럽의 조상들 중에서 감각이 뛰어난 사람들은 인체, 동물, 식물, 금속 그리고 결정체에서 방사되는 빛을 보아왔고, 땅으로부터 방사(放射)되는 에너지(氣)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기감봉과 기감추를 사용하여 수맥(水脈)이나 금광(金鑛), 은광(銀鑛), 동광(銅鑛), 연광(鉛鑛) 등의 광물(鑛物)을 찾았고, 사람의 몸에서 방사되는 에너지를 치료의 목적으로 사용하였다.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또는 이런 사람들에 대하여 수많은 연구 조사가 시작되었다.
"인간이 기감추(氣感錘)와 기감봉(氣感棒)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인류 자체와 같이, 고대인들이 땅으로부터 방사(放射)되는 에너지(氣)를 알았던 것과 같이 오래 되었다. 옛사람들은 기감봉을 사용하여 물을 찾았고, 고대와 중세에는 광물도 기감봉을 사용하여 찾았다.
고대에는 기감봉 모양이 막대기와 같은 일자(一字)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근거로 그리스인들의 라디에스테지를 라브도만티(Rhabdomantie)라고 불렀다. Rhabtos 는 “막대기”를 그리고 mantie 는 “보다”를 뜻한다. 라브도만티는 사원 건축의 비밀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중세에는 라디에스테지를 Wunscili gerta 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11 세기까지 고대 독일어는 uunschiligarta 와 uunskilgartel 로 “원하다” 와 “나무 가지”를 뜻하는 말의 합성어로, 또는 hasilriuta, 즉 “개암나무 가지”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후에 괴테(Goethe)는 마술의 나무 가지(magisches Reis)로 표현하였다.
고대 로마어 에서도 처음에는 virgula mercurialis, 후에는 virgula divinatoria 로 “미래를 말해 주는 막대(Weissagerute)"를 뜻한다. 현재는 버드나무나 개암나무 가지와 자작나무, 너도밤나무, 참나무 그리고 서양 물푸레나무 등이 기감봉의 재료로 쓰인다. 스칸디나비아 지역 사람들은 서양 물푸레나무(ash, Esche)를 오랜 기간 동안 가장 좋아한다.
인도 게르만 문화에서는 개암나무를 가장 좋아한다. 인도의 사제인 브라만(Brahman)은 개암나무 지팡이를 들고 다닌다. 독일인들도 개암나무를 가장 좋아한다. 그러나 기감봉의 재료로는 호두나무와 과수(果樹)를 사용한다. 아그리콜라(Agricola)에 의하면 16 세기경의 기감 능력자들은 특히 광맥 위의 땅에서 자란 개암나무일 때, 그 나무로 기감봉을 만드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이런 생각이 가능하다. 광맥 위에서 자란 나무로 기감봉을 만들었을 때, 광맥 위에서 오랜 기간 자란 나무가 가지고 있는 광맥의 금속 기운이 기감 조사시에 기감 능력자의 기감을 증진시켰을 것이다.
개암나무는 은광(銀鑛)을 찾을 때 사용하였고, 서양 물푸레나무는 동광(銅鑛), 유럽 소나무는 연광(鉛鑛)과 아연광을, 그리고 금광을 찾을 때는 쇠나 강철 기감봉이 사용되었다. 나무 기감봉의 중요한 점은 막 꺾은 신선한 나무 가지이면서 탄성이 있고 균일하고 1 cm 두께에 40 - 50 cm 정도 길이의 Y 형의 가지가 쓰여졌다. 나무는 쉽게 건조하게 되고 잘 부러지기 때문에 현재는 알루미늄, 구리, 황동 그리고 강철로 기감봉을 만든다. 또한 고래뼈나 뿔, 그리고 플라스틱 등의 재료가 기감봉으로 쓰인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Rhabdomantie ( Rhabtos =막대, Mantie= 見 ) 라는 말을 사용하였고, 이 말은 기원 전 14 세기까지 기록을 추적할 수 있다. 또한 성경책에도 예언자 에제키엘과 예언자 호세아가 자신의 민족이 나무와 막대기에 질문을 하는 내용을 쓰고 있다. 막대는 점치는 뼈, 지시봉, 지휘봉,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지휘봉, 장군의 지휘봉, 주교의 막대 등과 같이 항상 힘의 상징이었다.
기감봉보다도 더 오래 전부터 기감추는 미래를 예언하는 일과 솔로몬의 반지 같이 마법의 도구였다.
기원 전 13,500 년 남아프리카와 토고(Togo)에서는 아연 광산이나 우물을 기감봉, 기감추를 사용하여 찾았다고 추측하고 있다. 기원전 3,000 - 300 년 고대 이집트 파라오의 무덤 부장품 중에는 기감추가 있었고, 조각상이나 그림에는 기감봉을 들고 있는 제관(祭官)들이 있었다.
기원전 4,000 - 3,000 년 중국에서는 자연을 관찰하여 쓰여진 풍수(風水)라고 하는 학문 체계가 있었고, 풍수는 보이지 않는 바람과 잡을 수 없는 물을 따서 바람과 물이라고 이름 지었다. 기원전 2,205 - 2197 년 시아(Hsia) 왕조를 세운 쾅위(Kuang Yue) 황제(B.C. 2,205 - 1,766)는 기감 능력(氣感 能力)을 가진 사람으로 법령을 선포 하였는 데, 기감 능력자(氣感能力者)가 집을 건축하기 전에 땅을 조사하여, 땅의 마귀(魔鬼, Erddaemonen)가 없는 곳에서만 집을 건축하도록 하였다.
기원전 2,000 년 바빌론 유물 중에 기감봉이 발견되었다. 기원전 1,900 년 요셉의 아내 아스베네트(Asbeneth)가 이집트에서 기감봉으로 물을 발견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기원전 1,550 년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씨는 모세가 호렙 산 근처에서 물을 찾기 위해 기감봉을 사용하였다 라고 쓰고 있다. 1929 년 발굴된 고대 유태인들의 시나고그 헤피치바(Hefizibah)에서도 기감봉을 든 그림이 있었다.
기원전 600 - 100 년 고대 켈트족의 사제인 드루이던(Druiden)과 켈트족의 시에서도 그리고 니벨룽엔 리트(Nibelungenlied)에도 기감봉이 여러 번 반복하여 나온다.
기원전 500 년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트(Herodot)는 지금의 남 러시아인인 스키타이인(Skythen)들이 버드나무로 만든 기감봉을 사용했다고 쓰고 있다.
기원전 100 - 43 년 시세로(Cicero)도 기감봉(de divinatione)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서기 330 - 375 년 로마의 역사가 아미아누스 마르첼리누스(Ammianus Marcellinus)는 기감봉, 기감추를 사용한 현재의 이란인 조상인 알란인(Alanen, 민족 대 이동 시 코카사스에서 남하한 종족)에 대하여 썼다.
375 년 그리스의 마술사들은 기감추를 사용하여 그 당시 황제의 후계자 이름을 예견하였다. 결과는, 24 개의 알파벳을 기감추로 조사하여, 테오(Theo)라는 4 알파벳까지, 마술사들은 동일한 결과를 가져서, 성급한 마술사 한 사람이 황제의 측근인 테오도루스(Theodorus)라고 결론을 내리는 중대한 실수를 하고 말았으니, 당시의 황제 발렌스(Valens)는 테오도루스를 교수형에 처하였다. 아직 마지막 알파벳을 기감추로 조사하지도 않았는 데. 터키의 안드리노펠(Andrianopel)에서 발렌스 황제는 378 년 살해당하고, 다음 황제로는 테오도시우스(Theodosius)가 즉위하였다. 이러한 일에 기감추를 사용하는 것을 영적(靈的)인 기감추 조사라고 한다.
1098-1179 년 힐데가르트 폰 빙엔(Hildegard von Bingen)의 책 중에 라디에스테지에서 유래된 여러 가지 생각들이 많이 나온다. 힐데가르트는 독일의 민간 요법을 정리하였다.
13 세기 나이트하르트 폰 로이엔탈(Neidhard von Reuenthal)은 V 형의 기감봉을 만드는 방법에 대하여 쓰고 있다.
1210 년 곳프리트 폰 쉬트라스부르크(Gottfried von Strassburg)와 1280 년 콘라트 폰 뷔르츠부르크(Konrad von Wuerzburg)는 기감봉을 언급하였다.
1332 년 중국의 첸 쑤 샤오(Chen Ssu-Hsiao)는 “지구는 사람의 몸과 흡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사람의 몸 속에는 수많은 힘줄과 핏줄이 흐르듯이 땅속에도 사람의 몸 속과 같이 수많은 수맥과 지층 그리고 바위 층이 있거늘, 사람들은 땅을 그냥 딱딱한 바윗덩어리로 된 물질로 본다. 사람의 몸도 보기에는 살덩어리로 보이지 않느냐“라고 쓰고 있다.
1490 년 에르푸르트(Erfurt)의 베네딕트회 수사인 발렌티우스(Basilius Valentius)는 기감봉 사용법에 대하여 썼다.
1521 년 Y 모양으로 2 갈래로 갈라진 기감봉이 처음으로 Le dragon rouge(붉은 용)으로 표현되었다.
1556 년 독일인 의사인 아그리콜라(Georg Agricola)가 라틴어로 “광업과 제련 (De re metallica)" 이라는 책을 썼다. 이 책은 1912 년 광산 엔지니어 출신의 후버(Herbert Clark Hoover) 부부에 의해서 영어로 번역되었다. 후버는 미국의 제 32 대 대통령을 역임했던 사람이다.(필자가 참고서적 목록에서 이 책을 발견하였다. Agricola, Georgius, De Re Metallica<On Metals>, translated by Herbert Clark Hoover and Lou Henry Hoover, Dover Publication, New York, 1950)
1561 년 영국 왕실이 독일인들의 광산 개발 경험에 흥미를 느껴 독일의 광산 전문가 쉬타인베르거(Marcus Steinberger aus Augsburg)와 협상하였다.
1700 년경 작가 헬리오피우스(Percis Heliophius)는 기감봉 파지법에 관하여 썼고, 기감 전문가가 몸에 지니고 다니는 금속 제품이 기감 조사시 기감봉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처음 발표하였다. 1618 - 1648 년, 30 년 전쟁 동안 기감 전문가들이 지하 자원 찾기에 동원되었다.
1640 년 보솔레이 남작(Baron de Beausoleil) 부부는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에서 150 개소 이상의 광맥을 발견하였다. 이 부부는 나중에 마귀의 힘을 이용하였다고 처형되었다.
1643 년 예수회 수사였던 키르허(Athanasius Kircher)는 거의 50 년 동안 기감봉 현상을 연구하였다. 그는 신비주의와 라디에스테지를 구별하기 위하여, 그 당시 용어인 <virgula divinatoria>를 <virgula metalliscopie>, 즉 금속을 찾기 위한 기감봉으로 바꿔 불렀다.
1651 년 독일 예수회 수사 쇼트(Gaspard Schott)는 기감봉 움직임은 마귀와 관계 있다고 썼으나, 후에 기감봉을 움직이는 힘의 근원은 기감 능력자의 상상이나 근육의 힘이 아닌 자연적인 근원을 가졌을 것이라고 부가하여 썼다.
17 - 18 세기 동안 기감봉은 특히 프랑스, 영국, 쉴레지아, 작센 그리고 폴란드 등지에서 광산 개발에 빛나는 성공을 거두었다. 프랑스의 어떤 책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프랑스 광산은 기감봉으로 찾았다 라고 쓰고 있다. 기감 조사 시작 전에 기감 능력자들은 시험을 치렀고, 독일도 기감봉으로 발견한 광산 덕분에 대단한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1652 년 클라우스탈(Clauthal) 은제(銀制) 맥주 잔이 만들어졌다.
1659 년 영국의 물리학 박사인 플러드(Robert Fludd)는 웨일즈에서 독일 기감 전문가들이 기감봉을 사용하여 조사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견해를 썼다.
1661 년 영국의 과학자 보일(Robert Boyle)도 기감봉 현상에 관한 글을 썼다.
1684 년 말브란헤(R. P. de Malbranche) 신부와 레부룬(Lebrun) 신부는 기감봉의 움직임을 마귀의 탓으로 돌렸다.
1690 년 프랑스에서는 르 카뮈(Le Camus) 추기경이 기감봉에 관계되는 모든 일을 금지시켰다.
1691년 클로드 프랑소와 메너스트리에(Claude-Francois-Menestrier) 신부는 기감봉 현상에 대하여 기감봉으로 아무런 답을 얻지 못하므로, 기감봉에 대하여 아무런 질문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발표하였다.
1693 년 물리 학자이며 신부인 드 발몽(de Valmont)는 광맥과 수맥에서 나오는 기운이 아주 미세한 물질이라는 견해를 발표하였다.
1700 년 차이들러(Johann Gottfried Zeidler)는 마크데부르크(Magdeburg)에서 기감봉에 관한 책을 썼다. 이 책에서 기감봉을 잡는 법, 기감봉으로 사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재료에 대하여 썼다.
1701 년 파리의 과학자 협회에서는 “기감봉과 기감추의 움직임은 물리적인 원인이 아니다” 라고 발표하였다. 같은 해 10 월 26 일에는 드 발몽 신부가 기감봉 효과에 관하여 쓴 글 때문에 종교 재판이 열렸다. 드 발몽 신부는 자신의 책에서 “옛날 학자들은 기감봉과 기감추 현상 연구에 기꺼이 시간을 투자하였다” 라고 주장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특이하게도 많은 학자 층에서 기감봉과 기감추 현상에 주목을 하게 되었다.
1704 년 라이프치히(Leipzig) 프로테스탄트 신학과에서는 알비누스(Theophil Albinus)의 기감봉 현상에 관한 책에 찬성하는 책의 내용을 가진 책이 발행되었다. 몇 년 후 광산 감독 국장인 폰 쉔베르크(Abraham von Schoenberg)는 “기감 능력자를 잘 대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연계의 경이로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라고 훈령을 썼다.
1747 년 키이슬링(J. G. Kiessling)은 자신의 글에서 “광맥을 찾는 데 기감봉보다 더 좋은 도구는 없다” 라고 썼다.
1775 년 천재 의사인 메스머(Dr. Anton Franz Mesmer)는 “동물 자기(動物磁氣, animalischer Magnetismus)"를 발견하였다. 메스머는 기감봉과 기감추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후에 폰 라이헨바하(von Reichenbach)의 “오드(Od)"나 쉬트라니악(Straniak)의 ”제 8 의 자연력“으로 불렀던 것의 준비자였다.
메스머는 ”플루이둠(Fluidum)"이라고 명명하였고, 그 성질은 양극성(兩極性, 陰陽)의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입장은 물리학적 입장이었고, 프랑스에서 대성공을 거두게 되나 공식 학계로부터는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괴테(Goethe, 1749-1832)도 기감봉과 기감추를 사용하였다. 그는 파우스트(Faust)에서 기감봉을 “마술의 가지(magisches Reis)"라고 불렀다.
1780 년 의사인 피에르 투브네(Dr.Pierre Touvenel)와 니콜라 자들로(Nikolas Jadelot)는 기감봉 현상이 전기와 관계가 있다고 추측하였다. 그 당시 전기 자기 현상에 대하여 연구 붐이 일어나고 있었다. 1781 년 의사인 투브네는 “기감봉 현상과 전자기 현상이 관계가 있다” 라고 발표하였다.
1796 년 독일 베를린의 의사인 후페란트(Dr. Christoph Wilhelm Hufeland)는 책을 썼는 데, “마크로비오틱(Makrobiotik) 또는 생명을 연장하는 예술”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괴테(Goethe)와 쉴러(Schiller)의 주치의로 활동하고 있었고, 마치 바둑판 모양으로 퍼져 있는 유해 지기 연구를 시작한 선구자였다. 당시에는 전기를 “Donnerkeil-Materie(번개 쐐기 재료)” 라고 하였다.
후페란트는 설명하기를 “사람의 몸을 엷은 유동적인 물질이 둘러싸고 있고, 사람 사이에 서로 잡아당기거나 서로 부딪히거나 한다. 이 물질은 그믐 때 하늘과 같은 파란색을 띠고, 유황 냄새가 나며, 이 물질을 만지면 마치 거미줄을 만지는 것 같다. 때때로 그것은 약한 바람 같고 타는 듯한 불꽃같기도 하고, 또는 동물의 몸에는 벼락과 같은 충격을 주기도 한다”라고 하였다.
후페란트가 살았던 시기에는 생명력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었다. “생명력은 지금까지 알고 있는 자연의 정교하고, 모든 물질을 관통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활동이다. 생명력(生命力, vis vitalis, Lebenskraft)은 자신과 가장 비슷한 성질을 가진 전자기의 힘을 가진 빛을 능가한다.”
1806년 독일 뮌헨(Muenchen)의 물리학 교수 리터(Hofrat Johann Wilhelm Ritter)는 기감추를 연구하였다. 1806 년 11 월 21 일 그는 이탈리아로 연구 여행을 떠나서,이탈리아의 과학자 카넬라(Cannella)와 공동 연구를 하였다. 두 과학자는 포르티스(Abbe Fortis) 신부의 시험을 거친 기감 전문가 캄페티(Francesco Campetti)가 어떻게 수맥과 광맥을 기감하는 가를 지켜보았다.
리터 교수는 기감 전문가 캄페티를 뮌헨으로 초청을 하여 기감봉과 기감추의 재료에 대하여 연구하였다. 리터 교수는 기감 능력이 별로 없어서 캄페티 같이 기감봉이나 기감추를 잘 다룰 수는 없었다. 어느 날 캄페티가 손을 리터 교수의 어깨에 얹었을 때 리터 교수는 좋은 기감 능력을 가질 수 있었다.
이리하여 리터 교수는 기감 전문가 캄페티와의 공동 연구로, 개인적으로 경험한 기감 현상은 기감 전문가의 몸을 통하여 기감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로 전달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중에 리터 교수도 캄페티의 도움 없이도 기감 능력을 가지게 되고, 더 기감 현상을 연구하여 특정 금속의 기감 모델을 연구하였고, 유기체의 음양 구조를 발견하게 된다.
그 당시의 기감 전문가들도 요즈음도 통하는 기감추로 질문 시 긍정은 시계 방향, 부정은 반시계 방향으로 대답하는 기감추의 대답을 알고 있었고, 리터 교수는 “기감추를 사용하여 어느 질문의 답을 얻고자 할 때는 전신을 다하여 집중을 하고, 자신의 기감에 대하여 깊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리터는 “Der Siderium" 잡지를 창간하고, 이 잡지를 통하여 여러 학문을 통합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1810 년 리터 교수는 세상을 떠났다.
프랑스의 마술사인 디 포테(Du Potet) (1776-1881)는 글을 썼는 데, 그 글을 통하여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폰 라이헨바하의 오드(Od)나 쉬트라니악의 제 8 의 자연력과 여러 면에서 일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메스머 신부같이 디 포테도 기감 연구의 선구자로 볼 수 있다.
1799 년 쉬트라스부르크(Strassburg) 대학의 교수인 게르보인(A. Gerboin)은 인도에서 기감추를 가져와 파리의 과학 협회(Akademie der Wissenschaft)에서 강연을 하였다.
1812 년 파리의 과학 협회 교수이며 화학자인 미셀 의진느 셔브렐(Michel-Eugene Chevreul)은 독일인 리터나 게르보인 교수 같이 기감추 운동이 여러 화학 원소에 대하여 다르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셔브렐 교수는 자신의 의지에 상관없이 무의식적으로 기감추 운동에 자신의 생각이 영향을 미친다고 확신하였다.
1826 년 트리스탄 백작(Graf de Tristan)은 20 여 년에 걸친 연구 결과를 발표 하였는 데, 그는 기감봉을 아주 예민한 검전기와 같은 기능을 가진 기구로 보았다. 즉 지표면에서 발산되는, 계절과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어떤 흐름을 느끼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1833 년과 1855 년 셔브렐 교수는 새로이 파리의 과학 협회에 기감봉과 기감추 운동은 기감봉과 기감추를 들고 있는 사람의 생각의 결과라는 258 페이지 분량의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1834 - 1843 년 프랑스 신부 파라멜(Paramelle)은 프랑스의 각지에서 천 개 이상의 샘을 발견하였다. 그가 조사한 샘 12 개 중에서 1개 정도의 샘은 물이 나오지 않았다.
1852 년 폰 라이헨바하 남작(Dr.Karl Ludwig Freiherr von Reichenbach)은 “예민한 사람(Der sensitive Mensch)" 라는 저서에서 쉬트라니악(Straniak)이 말한 제 8 의 자연력과 일맥 상통하는 ”오드(Od)"에 대하여 썼다. 그는 1788. 2. 21. 쉬투트가르트(Stuttgart)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연에 존재하는 사람에게서나 물건에서나 발산되는 에너지를 오드(Od)라고 명명(命名)하였다.
1863 년 카톨릭 신부인 프랑스인 Carrie는 기감추와 기감봉에 관한 유명한 책을 썼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수맥이나 광맥은 무게가 없는 플루이둠(Fluidum)을 발산하는 데, 그 영향으로 지표면에 전자기적 흐름이 생겨난다. 기감추나 기감봉의 움직임은 사람의 몸에서 발산되는 전자기적 흐름이 지표면에 있는 전자기 흐름과 만날 때 반응을 보이게 된다.“
1863 년 카톨릭 신부 포르틴(Fortin)이 검류계(Galvanometer)를 발명하였다. 이 기계는 예민하게 파동에 반응하였고, 포르틴은 이 기계를 마그네토메터(Magnetometer)라고 불렀고 지하 수맥을 발견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1891 - 1892 년 동경 대학 교수를 역임했던 화학자 코르쉘트(Oskar Korschelt)는 1884 년 독일로 귀국하여 “에테르-기-장치(Aether-Strahl-Apparate)" 라는 기계를 발명하였다. 이 기계를 사용하여 동식물의 성장 속도를 향상시킬 수 있었다. 코르쉘트 교수가 만든 힘은 쉬트라니악의 제 8 의 힘과 동일한 것으로 그 자신은 이 힘을 ”암태양기(暗太陽氣, dunkle Sonnenstrahlen)" 라고 불렀다.
1897 년 스위스의 화학자인 치글러(Martin Ziegler)는 불어로 된 제 8 의 힘에 관한 책을 썼다. 그는 이 힘을 아토니시트(“Atonicite")와 조와시트(”Zoicite")로 불렀고, 기감추나 기감봉은 사용하지는 않고 Drosera rotundifolia 라는 식물을 실험 지표로 삼았다. 이 힘을 저장하기 위하여 그 당시에 벌써 축전지와 케이블을 사용하였고, 이 힘의 물리적인 성질을 규명하기 위하여 수많은 실험을 행하였다. 그 결과는 쉬트라니악의 제 8 의 힘 법칙과 일치하였다.
19 세기 말엽까지 유럽에서는 기감 현상에 대하여 과학자들과 교회간의 투쟁이 시작된다. 종교 개혁 시기부터 수많은 기감 능력자들이 마귀로 몰려 종교 재판을 통하여 화형에 처해졌다.
비로소 20 세기 초반에야 현대적 의미의 라디에스테지(기감학, 氣感學)이 태동하게 되고, 기감봉(rute)이 “생 물리 측정기(biophysikalisches Messgeraet)"로 불리게 되었다.
20 세기초까지 기감 능력자들은 객관적 자연의 힘이 무엇인지 아직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까지 수많은 사람들은 사람의 생각이 전능하고 사람의 무의식 세계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901 년 19 세기 말 프랑스에서 유명한 기감 능력자 쟌스(Janse)가 두각을 나타낸다. 그는 철 광맥과 니켈 광맥이 나침반 바늘을 움직이는 것을 발견하게된다. 그리하여 그는 광맥이 증발하여 나침반 침에 나타난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는 드 모로그 남작(Baron de Morogues)의 논문과 베커렐(Becquerel)의 전기 자기 논문을 수년 간 공부를 하여 1884 년 기감봉으로 일을 시작하였다.
처음으로 방드(Vendee), 지금의 알제리에서 수많은 샘과 지하 광맥을 발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알제리의 지리학 협회, 체신 전보 국장, 파리의 알제리 지방장관, 관계 정부 부처, 과학 아카데미 등에 자신의 성과에 관하여 편지를 보내었으나 아무런 답신을 받지 못한다. 같은 해 낭시(Nancy)의 발롱드로(Blondlot) 교수는 방사선을 발견하여 발견 장소인 낭시를 따서 “N-선”으로 명명하였다. 그리고 연구 동료인 샤팡티에(Charpentier) 교수는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방사능을 발견했다.
1903 년 독일 황제 빌헬름 2 세(Kaiser Wilhelm II.)의 명령으로 유명한 기감 능력자 폰 울사르(von Ulsar)는 농사용 우물 자리를 찾아 주기 위하여 나미비아로 파견되어, 몇 년 내에 800 개소의 샘 자리를 약 82% 의 성공 확률로 개발하였다. 그 당시 독일의 학자들은 그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기감 현상을 진심으로도 지속적으로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1904 년 프랑스 기감 능력자 드 그리제(M. de Grisez)는 땅(Thann) 에서 10 Km 떨어진 알사스(Elsass)의 비텔스하임(Wittelsheim) 에서 칼리 소금 광맥을 발견하였다. 이 광산은 그가 예견한 자리와 깊이에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광맥의 깊이에 있어서는 그가 예견한 깊이와는 틀릴 때도 있었다. 아마도 그는 기감봉을 움직이는 힘의 근원의 세기가 변한다는 사실을 , 그리고 그로 인하여 잘못된 결과를 가져온다고 처음 언급한 사람일 것이다. 그는 라디에스테지 연구소를 설립하려고 했으나 1914 년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1905 년 스위스 신부인 메르메(Abbe Mermet) 씨는 기감봉과 기감추를 사용하여 유명해 졌는데, 메르메 신부의 아버지도 기감 능력자였다. 메르메 신부는 기감추를 사람의 건강 진단에 사용하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건강한 신체 부분과 아픈 부분은 기감추의 움직임이 다른 것을 발견하게 되었고, 아픈 부분과 기감추 움직임이 동일한 약을 투약(投藥)하여 치료하였다.
1914 - 1918 제 1 차 세계 대전 동안 기감추 능력자와 기감봉 능력자는 물, 동굴, 불발탄을 찾기 위하여 모든 전선(戰線)에 투입되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프란쯔 요셉 황제(Kaiser Franz Josef)는 공병 대령인 칼 바이흘(Oberst Carl Beichl)을 알프스산 지역의 물은 찾는 데 임명하였다. 바이흘 대령은 자신의 군복에 금색 기감봉을 병과 표시로서 달았다.
바이흘은 갈리시아와 헤르체고비나 지역의 군부대를 여행하여 예민한 기감 능력을 가진 장교들을 찾아서 기감 능력자로 양성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1914 년과 1915 년에 자베(Sawe)와 도나우(Donau) 지역에서 기감봉으로 광산(鑛山)을 찾았고, 알프스산 지역과 베네티언(Venetien) 지역에서 수많은 지하 수맥(地下水脈)을 찾아내었다. 바이흘 대령은 지하 수맥의 깊이가 정확히 몇 미터인가 예측하였고, 비인(Wien) 분지의 온천과 오버라아(Oberlaa) 온천을 발견하였다.
불리(Bouly) 신부와 라시노(Racineux) 신부는 릴르(Lille) 지역의 격전지에서 지뢰를 제거하는 작업을 하였다. 그리고 1915 년 “라디에스테지(Radiaesthesie)"라는 지금도 쓰이고 있는 명칭을 정하였다.
1917 년: 프랑스의 기감추 연구가 라바롱(Larvaron)과 레그노(Dr. med. Regnault)는 툴론(Toulon)에서 공동 연구를 하였다. 백작 부인인 샤를로테 폰 튀퀘리(Charlotte von Tuekoery)는 오스트리아의 샬러바하(Schallerbach) 온천을 발견하였다. 비인의 하르트레벤(Hartleben) 출판사에서 모리츠 베네딕트(Moritz Benedikt) 교수의 “기감봉과 기감추 연구” 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1919 년: 전쟁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오컬트(occult, 신비주의, 라틴어 occult에서 유래한 단어로 “감추어진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가 유행하게 되었고, 특히 기감추 기감이 많은 인기를 끌었다.
독일에서는 기감추와 기감봉 분야의 연구 결과가 발표되기 시작했다. 많은 재미있고 중요한 내용이 들어있는 게프켄(Geffken)의 “N-기(N-Strahlen)에 대한 새로운 것”, 쉐민츠키(Schemintzky) 교수의 “광물의 방사(Emanation der Mineralien)", 프리드리히 베메(Dr. Friedrich Behme)의 ”1914- 1918 년 동안의 전쟁 기간 동안의 기감봉“, 1920 년 게오르크 하버슈툼프(Georg Haberstumpff)의 “기감추의 움직임의 종류에 대한 연구”, 호프만(A. Hofmann)의 “기감봉과 기감추”, 욀렌하인쯔(Oelenheinz) 교수의 “기감 반지(der Wuenschelring)", 프리쯔 크바데(Fritz Quade)의 ”오드학“, 차카리아(Zacharia)의 ”자연의 수수께끼“,
1921 년 게스만(Gessmann)의 “초감각 영역으로부터”, 1922 년 하인(Dr. med. R. Hein)의 “인간의 유체(流體)(Fluidalkoerper des Menschen)", 마리아 로렌쯔(Maria Lorenz)의 ”보석의 오컬트적 뜻과 오컬트 식물학“, 루쉬(Dr.Rusch)와 폰 레베초프(Freiherr von Levetzow) 남작의 ”기감추“, 수르야(G. W. Surya)와 발리어(Vallier)의 제 8 의 자연력과 천문학과의 연관성을 연구한 ”오컬트 우주학“, 차카리아의 ”세계 창조의 숨겨진 폭력“, 프랑크 글란(Frank Glahn)의 ”기감추의 사용“이라는 책을 발표하였다. 많은 기감 능력자들이 글란의 이론에 의해 교육을 받았다.
1923 년 호프만(A. Hofmann)의 “오드의 불꽃”과 “대기 속의 자기력”, 퍼위트 소우(Peryt Shou)의 “로고스의 치유력”, 바이스(Dr. med. Weiss)의 “미세 재료 영역의 기감추”가 발표되었다. 이 해에 전쟁 후의 첫 번째 기감추 능력자 회의가 파리에서 개최되었다.
1924 년 게디케(W. Gaedicke)의 “기감추, 기감봉 그리고 다른 기감 기기”라는 논문이 발표 되었는 데, 이 책에서 게디케는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기감 기기를 다루고 있다. 프리츠 기제(Fritz Giese)는 “생각 파의 연구”를 발표하였다. 생각이 심리물리학적인 에너지라고 쏘련의 과학자 나움 코틱(Naum Kotik)이 증명하였다.
게디케는 생각의 에너지가 빛과 전기의 틈새에 놓여 있고, 생각을 기계적인 작용으로 설명을 하고 있다. 이 책의 아이디어는 감각을 하나의 에너지의 형태로 이해하는 모든 과학자들에게 새로운 자연 철학을 제시하였다.
1925 년 아담 폴(Dr. med. Adam Voll)은 “기감봉”이라는 제목의 책을 발표하였다. 폴 씨는 오랫동안 기감봉으로 기감을 행한 기감 능력자였다. 글란의 2 번 째 책인 “자연의 무선 방송”이 발표되었다.
1926 년 독일에서 인도 사람인 라마 프라사드(Rama Prasad)의 산스크리트로 쓰여진 책을 독일어로 번역한 “미세 자연력”이라는 책이 출판되었다. 지난 천 여 년 동안의 인도에서의 진동에 대한 가르침을 소개해 주고 있다. 이 해에 파리에서 프랑스 기감추 능력자 대회가 개최되었다. 그레고 그레고리우스(Gregor A. Gregorius)의 5 권의 “마술의 편지들”이라는 책이 출판되었다.
1927 년 칼 바이어(Karl Th. Bayer)의 “천문학의 근본 문제들”이라는 책과 그루네발트(Grunewaldt)의 “메스머에서 Coue 까지”라는 책에서 메스머의 가르침을 잘 설명하고 있다. 파리의 라코프스키(Prof. Lakhovsky) 교수는 “L'Universion" 이라는 자연의 우주 힘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에발트 파울(Ewald Paul)의 ”색광(Farblicht) 치료의 발전“과 ”농업에서 빛과 색의 쓰임“이라는 책을 발표했다.
1928 년 알제리아의 수도인 알제리에(Algier)에서 프랑스 기감추 능력자 대회 개최되었다.
1929 년 의사인 글라젠(Dr.med. Glasen)은 “기감추 진단”이라는 책을 발표하였다.
1930 년 유명한 프랑스의 기감추 연구가 앙리 마그르(Henri Mager)는 “Les sourciers et leurs procedes"라는 글을 발표했다. 독일에서는 기감추 능력자를 신비주의자라고 박해를 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목받을 만한 책들이 발표되었다.
1930 - 1931 년 프랑크 글란의 6 권의 “기감추 총서”라는 책을 발표하였다. 제 1권은 기감추의 사용법, 2 권은 금속, 광물 그리고 식물, 3권은 기의 자연력, 4 권은 정신과 영혼, 5 권은 육체, 병 그리고 치료제, 6 권은 영혼의 무선 방송- 영적인 기감추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글란은 지데리쉬(siderisch, "항성의, 성좌의“라는 뜻, 기감추를 보통 쓰는 추<das Pendel>와 구별하기 위하여 das siderische Pendel 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라는 단어의 의미가 사람들을 오도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괴테의 의견과 같이 기감추라는 단어를 남성의 성(der Pendel)으로 구분했다. 투렌느(Turenne) 교수는 “De la baguette de coudrier aux detecteurs du prospecteur"와 “La lumiere-les couleurs" 라는 2 권의 프랑스어로 쓴 중요한 책을 발표하였다.
1930 년 이후로 프랑스에는 ”La Chronique des Sourciers" 라는 월간지가 발행되고 있다.
1931 년 독일에도 “기감추 연구의 중앙 잡지” 라는 베른하르트 쉬포른(Bernhard Sporn) 출판사의 월간지가 발행되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유명한 독일 의무감이었던 카셀 출신의 헤르만(Generalarzt Dr. Hermann)이 쓴 글이 고주파와 빛 연구 협회의 소식지에 유일하게 실렸다. 이 글은 쉬트라니악의 제 8 자연력에 관계 있는 내용이었으나 인정을 받지 못했다. 스위스 사람들도 독일인이나 프랑스인들 보다 뒤지지 않았다. 우니온 출판사(Union A.G.)에서 월간지를 발행하였다.
1932 년 그레고 그레고리우스의 “거울과 수정의 마술”이라는 책을 썼다. 스위스 취리히(Zuerich)의 뮐러(Mueller)는 “살아 있는 사람의 육체 방사의 객관적 실증”이라는 책을 발표하였다. 보비스(Bovis) 는 “De la Radiation de tous les Corps"이라는 제목의 책을 발표하였다. 프랑스의 아비뇽(Avignon), 그랑빌(Granville) 과 로잔느(Lausanne) 에서 기감추 능력자 회의가 개최되었다.
독일에서는 프라이헤르 폰 폴(Freiherr von Pohl)의 ”암을 유발하는 원인인 유해 지기“라는 책이 발표되었다. 이 책에서 유해 지기가 암을 유발한다는 통계를 보여 주었다. 약사인 루드비히 셀(Ludwig Sell)은 ”기감추 반응의 안테나로서의 사람“이라는 책을 발표하였다.
막스 플랑크(Max Plank)는 “과학자들이 유해 지기 현상을 진지하게 연구해야 한다”라는 의견을 지지하였다.
1933 년 프랑스에서는 4 회의 기감추 회의가 개최되었다. 그 중 아비뇽 회의와 파리 회의는 국제 회의였다. 독일에서는 마츠 쉬페어링(Mats Sperling)의 “원자의 독재”라는 책이 발표되었다.
1934 년 로잔느에서 9 월 16 일부터 22 일 까지 국제 기감추 회의가 개최되었다.
1935 년 프랑스의 니스에서 기감추 회의가 개최되었고, 파리에서는 Association scientifique francaise de Radiesthesie 라는 월간지가 피토와(Pitois)가 발행하였다.
에밀 크리스토프(Emil Christophe) 는 영적인 기감추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 흥미 있는 “Tu sera sourcier" 라는 책을 발표했다. 크리스토프는 땅속에서 기운을 방사하는 모든 물체에 기감 능력자가 반응한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중요한 점은 기감 능력자가 자신이 찾고 싶은 물체에 정신을 집중하여 그 물체를 찾고 싶다는 생각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정신 집중을 그는 기감 유도 ”Mentale Orientierung" 이라고 불렀다.
그의 제자 중의 한사람이 베네딕트회 수사 몰베르크(Cunibert Leo Mohlberg)였다. 독일에서는 크리스토퍼 디트리히(Christoph Dietrich)의 “기감추를 어떻게 배우는가” 라는 초보자를 위한 책이 발표되었다.
1939 - 1945 년 동안의 세계 제 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독일군은 땅속의 지뢰와 탄약을 기감 능력으로 찾았고, 독일군의 해군 작전에 기감 능력자들이 동원되었다. 기감 능력자들은 미국과 영국의 함대를 기감하여 지도에 표시하는 임무를 수행하였고, 기감 능력이 있는 수천 명의 기감 능력자들이 전술적(戰術的)인 목적으로 배치되었다.
1941 년 비인 출신의 건축가 아르트만(Paul Artmann)은 노르웨이에서 사단 참모로 근무하면서 기감봉을 사용하여 물 부족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는 천천히 나는 비행기내의 공중에서 물을 기감하여 찾았다. 나중에 러시아 사람들이 이 방법을 전수하였다.
1943 - 1944 스위스의 일간지인 Neue Zuericher Nachrichten 지는 1943 년 5 월부터 1944 년 2 월까지 “라디에스테지 스타디”라는 제목의 베네딕트회 수사인 몰베르크(Cunibert Leo Mohlberg)의 기사를 연재하였다.
1944 년 러시아 출신의 지질학자들이 이해 1 월에 “전기”라는 잡지에 기감봉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지질학 연구소에 근무하는 지질학자, 붉은 군대의 군인 등 100 명이 넘는 사람들을 전기 케이블, 물이 흐르는 관, 새어 나오는 수맥 등을 탐지하도록 하였다. 러시아의 지질학자들은 땅위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너무 강하여, 나무로 만든 기감봉을 들고서 기감하는 기감 능력자의 기감봉이 부러질 정도의 강한 힘이 발휘되는 것을 확인하였다.
자신이 기감 능력을 가지고 있는 지질학자이며 광물학자인 소체바노프(Sotschewanow)는 강선(鋼線)으로 기감봉을 만들어 부러지지 않고 기감 시험을 하였다. 기감봉 현상의 신비를 풀기 위해서 “생물리학 현상(Bio-physische Effekte, 약자 BPE)" 라고 불렀다.
그는 여러 기감 능력자를 실험하여 악기상(惡氣象) 하에서는 기감봉이 잘 기감이 되지 않는 현상을 발견하였다. 또한 러시아 학자들은 아주 미세한 자기장에도 그리고 지구 자기장의 이상에도 기감 능력자들이 반응한다는 것도 발견하였다. 쏘련의 학자들은 물, 광물 그리고 많은 것들이 미지의 역장(力場)에 둘러싸여 있고, 많은 사람들이 이 역장을 감지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견해를 대변했다.
1945 년 몰베르크 교수가 “칸디, 라디에스테지 연구, 취에게 보내는 편지(Candi, Radiaeshetische Studien, Briefe an Tschue)" 라는 책을 발표하였다. 몰베르크 교수는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자이고, 베네딕트회 수사로 스위스 연방 대통령으로부터 연방 공로 십자가 훈장과 1958 년 4 월 29 일 취리히 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다.
1947 년 프랑스 의사인 피르(Peyre)는 “우주와 지구의 기”라는 책을 발표하였다. 스위스에서는 상트 갈렌(St. Gallen) 출신의 마인라트 마우흘레(Meinrad Mauchle)를 회장으로 라디에스테지 협회가 창설되었다.
1949 년 8 월에 쉬트라니악(Ludwig Straniak) 씨의 ‘기감 능력자에게 주는 경고’라는 글이 발표되었다. 이 글에서 그는 “제 8 번 째 에너지 형태는 우리 인간이 지금까지 알 수 있었던 신과 가까운 에너지로 보여진다. 이 에너지의 법칙은 신의 도장을 지니고 있고, 이 법칙은 기본적으로 간단하고, 이 법칙의 작용은 영구적이고, 이 법칙의 결과는 무자비하다. 그러나 그 법칙을 만든 사람에게는 순종한다. 아무 것도 인간 영혼의 신적인 원인을 보여 주지는 않았지만 이 힘은 인간에게 이로워야만 하고 그리고 실제로 이 힘을 알아차리는 사람에게 이롭다. 이 힘을 안 사람에게 항상 신적인 자유에 의하여 좋은 목적으로 쓰이기를 바란다” 라고 말했다.
그는 기(氣)의 다른 명칭인 ‘제 8 번 째 에너지(the 8th energy)’라는 말을 사용하였고, 기감학 이론의 틀이 확립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미국의 뉴욕에서 영어로 된 스콜로 트롬프(Scolo W. Tromp)의 “라디에스테지에 대한 학문적 해석”에 대한 글이 출판되었다. 이 책에서 살아있는 유기체 내의 전자기 활동에 대한 백과 사전적 개요를 담고 있다.
1950 년 빈의 루돌프 믈라커(Oberst Rudolf Mlaker) 대령이 메르메 신부의 글을 더 발전시켰다. 믈라커는 높은 기감추 실습 단계인 영적인 기감추에 대한 내용을 자신이 쓴 책인 “영적인 기감추”에 발표하였다.
1951 년 독일인 지크프리트 비트만(Siegfried Wittmann)은 데트몰트(Detmold)에서 “극장(極場, polare Felder)또는 대각선 격자의 발견에 대한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같은 해 에버바하(Eberbach) 출신의 의사인 하르트만(Dr. med. E. Hartmann)은 조그만 연구 단체를 결성하였다.
1952 년 독일계 미국인이며 의사인 만프레드 쿠리(Dr. med. Manfred Curry)는 의사들의 잡지인 히포크라테스(Hippokrates)에 지크프리트 비트만이 발견한 격자 구조를 “쿠리 격자”라고 발표를 했다. 그리하여 라디에스테지의 역사에 쿠리 격자라는 이름이 남게 되었다.
1953 년 독일인 안톤 벵커(Anton Benker)는 “원자 입방 시스템”을 발견하였다. 스위스 라디에스테지 협회가 루체른에서 개최되고, 회장은 마인라트 마우흘레(Meinrad Mauchle)가 부회장은 에른스트 라우프(Ernst Laub)가 맡게 되었다.
1955- 1977 년 폴 클레멘트 브라운(Paul Clement Brown)이 미국의 원유 매장지를 라디에스테지의 방법으로 조사하였다. 브라운은 충분한 경험을 가지지 못한 기감 능력자가, 매장량이 얼마 되지 않은 경제성이 없는 원유 매장지를 충분한 매장량이 되는 것처럼 과대 평가하는 기감 능력자와 일을 하는 원유 시추 업체가 기감 능력자를 신뢰하는 것에 대해 말하였다.
1958 년 19 년 동안의 연구에 의하여 소련의 크라스노다르(Krasnodar)에 살고 있던 전기 기사인 다비도비치 키를리안(Davidowitsch Kirlian) 씨와 그의 아내인 여교사이면서 언론인인 발렌티나 키를리안(Walentina Kirlian) 씨 부부는 손가락 끝, 손, 그리고 나무 잎사귀의 편광(偏光)된 이온인 오라(aura)를 사진으로 찍는 데 성공하였다. 이 사진술은 오늘날 ‘키를리안 사진술(Kirlian photography)’이라고 알려져 있다.
1963 년 몰베르크 교수가 세상을 떠났다.
1966 년 10 월 21 일 쏘련과 중국의 국경 지대인 알마 아타(Alma Ata)에서 폭파 실험을 시행하였다. 이 실험에 땅 속의 지질 물리학적인 이상을 계측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의 측정 기계가 사용 되었는 데, 자기 계측과 지질학적 계측 장치 이외에도 쏘련의 과학자들은 라디에스테지 능력자들을 초청하여 실험 지역을 조사하게 하였다. 지나간 여러 해 동안 쏘련인들은 라디에스테지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였다.
라디에스테지는 쏘련에서 공식적인 학문의 분야로 발전하게 되었다.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의 지질학 연구소에서는 지질학자, 지질 물리학자 그리고 생리학자들이 라디에스테지에 대하여 연구하고 있다. 학자들은 라디에스테지의 방법이 세간에 널리 행해지는 지질 물리학적인 방법들을 대체할 수 있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 쏘련의 수문(水文)학자들은 기감봉으로 물이나 지하 광물뿐만 아니라 지하 수맥, 케이블의 깊이나 수도관의 직경까지도 조사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1966 - 1967 년 민간 분야에서 물을 찾을 때 기감봉을 사용한 미국인들도 베트남 전쟁 동안 정글에 숨어 있는 베트콩의 은신처를 찾기 위하여 기감봉을 사용하였다. 모든 전투 지역을 기감봉과 기감추를 사용하여 지하 터널 시스템과 무기 저장고 그리고 음식물 저장고 등을 기감 조사하였다.
1967 년 3 월 13 일 베트남에 주둔하는 미군을 위하여 발행되는 주간 잡지인 업저버(observer)지는 미 해병대 병사들이 베트콩 터널을 찾기 위하여 기감봉을 사용한 것을 보도하였다.
1968 년 모스크바에서는 236 명의 모든 쏘련 연방에서 온 과학자들이 “생 물리학적 효과(Bio-physikalischer Effekt, BPE)"라는 주제로 세미나가 개최되었다.
2차 세계 대전 동안에 러시아에서도 기감 능력자가 군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1971 년 모스크바에서 다시 “기감봉의 생 물리학적 효과”에 대하여 세미나가 개최되었다.
1972 년 이태리계 스위스 사람인 물리학자 안젤로 코무네티(Dr. Angelo Communetti)와 엔지니어인 루돌프 루프(Rudolf Rupp)와 영국의 화학자 피터 트레드웰(Dr. Peter Treadwell)은 스위스 바젤(Basel)에 위치한 제약 회사인 호프만 라로헤(Hoffmann-La Roche) 사의 요청에 의해 지하 수맥 위에서 기감봉으로 실험하였다.
1973 년 러시아인들은 비행기에서 기감봉으로 광물의 매장 위치를 찾았다. 현재 러시아인들은 가장 잘 훈련된 기감 능력자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게오르크 야콥(Dr. med. Georg Jakob)이라는 가명으로 “의학적 기감추를 위한 책”을 발표했다. 이 책은 의사나 보통 사람들을 위하여 쓰여졌고, 오랜 시간 동안의 경험에 의해서 빠르고 안전하게 기감 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이 책의 시스템은 개인적으로 변경될 수 있고, 많은 가능성을 제공했다. 이 책의 글은 의사이며 유사 요법 전문가인 렘(Dr. med. E. Rehm)이 썼고, 기감표는 프란치스코회 수사이면서 유사 요법 전문가인 이노첸츠(Innocenz)가 작성하였다.
이노첸츠 수사는 독일 국내와 해외에서도 알려진 사람으로 기감 능력자이면서 병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연구하기를 좋아했다. 수도원 측은 이노첸츠 수사가 병자를 도와주면서 유사 요법(Homoeoopathy, homoeo 는 그리스어 homoios 에서 온 말로 “비슷하다”는 뜻이다. 유사 요법에서는 자연의 약초 엑기스 등을 약초 엑기스의 바이오 에너지만 남을 때까지 100 배, 1,000 배 희석하여 환자에게 투여함으로서, 약초의 바이오 에너지가 환자의 물질적인 바이오 에너지인 에테르체의 이상이 있는 곳의 바이오 에너지를 보충해 줌으로서 환자의 자연 치유력을 증진시키는 치료법을 말한다)을 사용하는 비범한 능력을 발휘하게 허용하여 주었다.
수도회 본부가 있는 풀다(Fulda)와 네덜란드 그리고 후에 오버쉬바벤(Oberschwaben)에서 체류한 후에 로트바일(Rottweil)에서 프란치스코회를 위한 구호 물자 취급자와 간호사로 일했다. 그 후에 치료실을 설립하는 일을 맡았고 수사를 만나러 동독과 유고슬라비아 등지의 먼 곳에서도 오는 환자로 문전 성시를 이루게 되었다. 원래 이름이 알로이스 블랑크(Alois Blank)인 이노첸츠 수사는 슈어탄넨(Schurtannen)에서 태어났고, 1984 년 12 월 13 일 10:40 분에 로트바일 병원에서 심장 마비로 죽었다. 그리고 12 월 17 일 알고이(Allgaeu)의 방엔(Wangen)에 묻혔다.
1975 년 허버트 쾨니히(Herbert Koenig) 교수의 “보이지 않는 세계”가 출판되었다.
1976 년 오스트리아의 기감 능력자 케테 바흘러(Kaethe Bachler)의 “어느 기감 능력자의 경험”이라는 책이 출판되었다.
1977 년 게오르크 키르히너(Georg Kirchner)의 “기감추와 기감봉”이 출판되었다.
1978 년 취리히에서 스위스 라디에스테지 협회 25 주년 기념 행사를 개최하였다.
1980 년 오버바하(Dr. J. Oberbach)의 라디에스테지 분야의 최근의 연구 결과를 포괄하는 “생의 불” 이 출판되었다.
1981 년 알로이스 펠더(ALois Felder)의 “우주와 카오스 사이의 인간: 생명을 주는 또는 죽음을 부르는 기운”과 에른스트 호흐(Ernst Hoch)의 “기감”이 출판되었다.
1982 년 프란츠 안톤 메스머(Franz Anton Mesmer)의 “우주의 요인”이 출판되었다.
1983 년 페터 만델(Peter Mandel)은 “에너지 터미널 점의 진단”이라는 책을 발표하였다.
1984 년 뮌헨의 Geo- und Bau-Biologie 협회(지생물학과 건축생물학 협회)에서 “Handbuch fuer Geo- und Baubiologie"(지생물학과 건축생물학을 위한 핸드북)를 출판하였다. 메르츠(Blanche Merz)의 ”힘의 자리(Orte der Kraft)“와 케테 바흘러(Kaethe Bachler)의 ”좋은 자리“ Cousto의 ”우주의 옥타브“, 그리고 라인하르트 쉬나이더(Reinhard Schneider)의 ”기감봉과 기감추의 입문서 그리고 교육 과정”이 출판되었다.
1985 년 앙어러(Angerer), 하르트만(Hartmann), 쾨니히(Koenig), 푸르너(Purner), 쉬미츠-페트리(Schmitz-Petri) 그리고 테오 오트(Theo Ott)의 공동 집필로 “인간, 기감봉, 병(Mensch Wuenschelrute Krankheit)”이 출판되었다.
1986 년 페터 만델(Peter Mandel)의 “색침(色針)핸드북(Handbuch der Farbpunktur)", 파울 쉬미트(Paul Schmidt)의 ”생명력의 교향악“, ”바이오 모자익(Bio-Mosaik)", "암-뇌의 세포 부활 시스템의 장애“, 메틀러(M. L. Mettler)의 ”대기의 유해 지기-고대인의 도량 시스템“, 하르트만(Dr. Ernst Hartmann)의 ”음양 구조와 반응형에 대하여“, 샤펜티어(Louis Charpentier)의 ”바스크 족의 비밀“ 등의 책이 출판되었다.
1987 년 안겔리카 회플러(Angelica Hoefler)와 마리오 아티(Mario Atti)의 “기감추를 이용한 윤회 연구”라는 책이 출판되었다.
1988 년 메르츠(Blanche Merz)의 “자리의 영혼(Die Seele des Ortes)”, 프레드리히 칼렌바하(Friedrich Kallenbach)의 “기감추의 개선 행열”, 루드비히 쉬트라니악(Ludwig Straniak)의 “자연의 8 번 째 큰 힘”이 출판되었다.
끝으로 기감추와 기감봉에 대한 연구는 1980 년도 이후에 와서 비약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Gertrud I. Huerlimann, Pendeln ist erlernbar, M & T Verlag, Zuerich, 2. Auflage, 1988, p.19-70)
유럽에서는 극동 아시아의 건강장수(健康長壽)를 위한 양생(養生)의 형태가 아닌 ‘기감학(氣感學)’이라는 순수 학문(純粹學問)의 한 분야(分野)로 기공(氣功)이 자리 잡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