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9. 07:59ㆍ기공의 인물/강대국의 기공 응용 사례
독일군의 기감 능력자 학교
Mayer-Winklbaur, Biostrahlen, Orac, Wien, 1986, p.56
"2 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의 히틀러의 권력 하에서 기감학은 기대하지 않았던 발전을 하게 된다. 오스트리아의 폰 라이헨바하 남작의 생각을 지지하고 있던 드레스덴의 화학 교수인 베어(Johann Karl Baehr) 씨의 아이디어를 의학자이며 철학자인 나치 당원이었던 뷔스트(Joseph Wuest) 씨가 이어 받는다.
또한 히믈러(Himmler, 친위대장) 씨의 측근인 수학자인 빔머(Joseph Wimmer) 씨가 관심을 가지게 되고, 빔머 씨는 친위대(SS, Schutzstaffel)의 명령으로 2 차 세계 대전 동안 “기감 능력자 학교”를 운영하게 되었다. 놀랍게도 나치가 다스리는 기간 동안 기감봉 현상에 대한 기초적인 학문 연구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뷔스트 씨와 빔머 씨는 수년간 뮌헨 대학에서 공동 연구를 하였고, 60 cm 길이의 V 형의 기감봉을 사용하여 화학 물질들을 기감 조사하였다. 이 연구를 통하여 기감봉이 어떤 원소에 특정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기감봉은 탄소, 구리, 질소, 인 그리고 망간 등의 물질에 움직임을 나타내었고, 각 물질마다 측정 가능한 특정한 각도로 움직였다.
그리고 화학 물질에 대한 기감봉의 움직임도 실험실에서 항상 같은 물질에 대하여 같은 기감봉의 움직임을 나타내었다. 즉, 가장 이상적인 자연 과학 실험의 기본 조건을 충족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과학자는 멘델레프 주기표의 54 가지 원소의 기감봉 움직임의 수치를 얻었다.
다음 단계부터는 이 연구는 더 이상 진척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이 연구는 논리적인 구조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 차 세계 대전이 끝난 몇 년 후에 러시아의 과학자들은 기감봉의 회전력과 물질과는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친위대장 히믈러씨가 1943년 1월 12일 러시아 시토미르(Shitomir)에서 요셉 빔머씨에게 보내는 편지
기감학 연구와 기감학 교육에 대하여 힘을 쓰고 있음을 격려하고, 새해에도 건강하기를 그리고 기감학 연구에 좋은 성과가 있기를 바란다는 내용이다.
출처: (Christopher Bird, Wuenschelrute, Moos. 3.Auflage. Muenchen, 1987, p.107)
강대국의 기감봉 사용
Mayer-Winklbaur, Biostrahlen, (Orac, Wien, 1986), p.14-19
"소련은 자국의 세계관과 정치 철학에 부합하면 무엇이던지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대가이다. 소련은 비과학적 분야 에서의 연구가 세계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발달하였다. 그리고 생기(生氣)에 대한 연구도 하였고, 生氣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1968 년 초 모스크바에서는 소연방의 모든 주에서 온 236 명의 지구 물리학자, 지질학자, 생물리학자, 의사 그리고 심리학자 등의 다양한 분야의 과학자들이 회의를 가졌다. 그들은 연방의 100 여 군데의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 회의의 이름은 “생 물리학적 영향에 대한 세미나” 였고, 중요 테마는 “volsebnyj prut"(마술의 나뭇가지), ”lozachodstvo"(기감학)이었다. 이 세미나의 참가자 중의 한사람인 바실리에프(Leonid Basiliev) 교수는 물질적인 세계관에 맞는 새로운 학문적인 이름을 발표했다.
그는 “생 물리학적 효과”(약어 학명 BPE, Bio-physical effect))에 대하여 그리고 생 물리학적인 방법을 말하였다. 그는 생기(生氣)에 대하여 연구하기 전에는 레닌그라드의 뇌와 신경 작용 연구소에서 일한 사람으로 자신의 전문 분야는 텔레파시(telepathy)였다. 기감학은 중앙 유럽에서 서쪽으로 그리고 동쪽으로 전파되었다. 우랄 산맥 지역에서는 서방사람들이 기감봉을 사용하여 광맥을 찾았는 데, 때때로 성공하였다. 시베리아 관통 철도 건설 본부에서도 노동자들을 위한 물이 필요한 때 기감봉을 사용하였다.
하천 토목 공사 엔지니어인 케브히스빌리(Georgij Kevchisvili) 씨는 모스크바의 세미나에서 2 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자신이 붉은 군대에 근무할 동안의 활약상을 소개하였다. 그의 임무는 가뭄으로 물이 부족한 북 코카서스 지역의 군부대를 위하여 우물 자리를 기감하여 정해주는 일을 하였다. 그의 기감 능력자로서 군 복무 기간 동안의 경험은 티플리스(Tiflis)에 위치한 과학 아카데미에 보관되어 있다.
2 차 세계 대전 동안 두 사람의 소련 엔지니어인 타레에프(Boris Tarejev) 씨와 소모노프(Evangenij Somonov) 씨는 기감봉을 사용하였다. “우리는 지하의 3 상 교류 케이블을 기감봉으로 찾을 수 있었다. 기감봉이 아래로 또는 위로 움직이는 방향을 기감해 보면 지하 케이블을 통하여 흐르고 있는 전기의 흐름 방향을 기감할 수 있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기감 능력을 타고난 기감 시험 대상자는 대단히 예민한 물리 측정 기구로 바뀌었다.
두 소련 엔지니어는 기감봉의 힘은 어떤 검전기 보다 수 천 배 이상 강력하다는 것을 증명하여 주었다. 긍정적인 뉴스가 소련에서는 뒤따랐다. 1971 년 모스크바에서 ”생 물리학적 현상“에 대한 두 번 째의 세미나가 개최되었다. 다시 소련의 지질학자들이 기감봉의 성공적인 사용 사례를 발표하였다. 기감봉을 사용하여 물뿐만이 아니라 금광을 발견하였고 시굴까지 했다는 것이다.
모스크바 세미나 집행 본부는 개인적인 문제들이 국가적인 문제로 발전되기 전에 변증법적 물질적 충돌을 예방하기 위하여 위원회를 만들었다. 연구 결과가 공개적으로 논의될 때, 기감 조사에 대하여 보수적인 지질학자의 저항감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 기감학이나 기감학에 관련된 문제에 가부의 결정을 내리는 일은 시간 낭비이다“
1973 년 프라하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러시아 측 위원회의 회장인 톰스크 공과 대학의 바리코프(Alexander Barikov) 씨는 기감학에 반대하는 학자들과는 반대의 의견을 가졌다. 그는 15 개의 나라에서 온 대표들에게 1,000 미터 깊이의 광맥을 비행기를 타고서 기감봉으로 찾은 사례를 발표하였다. 그의 발표에 따르면 약 200 m 상공에서 시속 200 Km로 날고 있는 비행기 안에서 기감봉을 사용하여 광맥을 기감 하였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기감봉을 사용하는 것이 종래의 방법보다 빠르고 비교가 안될 정도로 싸다는 것이었다. 보수적인 지질학자들의 저항이 너무 거세어 그는 많은 과학자들을 놀라게 하지는 않았다. 지금 소련은 아마도(미국도) 기감봉을 응용하는 사례에 있어서 많은 연구를 발전시켰을 것이다.
이 분야의 연구를 하고 있는 오길비위(Alexander Nikolajewitsch Ogil'vij) 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인간의 육체는 전기가 통하는 회로를 가진 살아 있는 생명체이다. 육체는 전자기장이나 광맥이나, 지하에 흐르고 있는 수맥이나 암반의 균열 틈 사이에서 생성되는 아직 미확인된 물리적인 장의 비틀어짐에 반응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감학은 신비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오스트리아와 외국의 여러 나라의 과학자들을 혼란시키는 유일한 문제이다.누가 알겠는가, 아마도 옛날에 유행했던 방법이 되살아날 것인지. 그렇게 되면 옛날의 기감학의 방법이 과학적 방법으로 인정되어서 대부분의 현재의 지구 물리학적인 방법을 물리치고 문제를 푸는 방법으로 될 것이다.“
기감학의 가능성을 생각해 보면, 지질학적 에너지 자원의 종말의 시대로부터 새로운 자원을 발견하는 시대로 구원되는, 인류를 위한 가능성을 알아차릴 수 있다. 소연방에서는 1970 년대에 코카서스에서 바이칼호까지 수 천 건의 생 물리학적 실험이 행하여졌다.
“세계를 돌아보며”라는 잡지에서 소체바노프Socevanov) 씨는 기감봉이 특정한 조건에서 기감 움직임이 발생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즉, 고압선이나 전기선 그리고 가스관이나 수도관 위에서 기감 움직임을 나타내었다고 쓰고 있다. 그는 53 명의 기감 능력자가 참가한 모든 실험은 반복 가능했다 라고 강조하고 있다.
타쉬켄트 출신의 지질학자인 보드나레프(Boris V. Bodnarev) 씨는 기감봉에 대한 박사 학위 논문을 “지질학적 조사에 생 물리학적 방법의 사용”이라는 제목으로 썼다. 교수단은 그의 학위 논문을 칭찬뿐만 아니라 그에게 하나의 과제를 주었다.
우즈베키스탄 잡지는 “보드레나레프 씨는 그에게 전혀 생소한 지하에 있는 물건들을 기감봉으로 찾는 일을 하였다. 한시간 내에 그는 50 개 이상의 생 물리학적으로 이상이 있는 장소를 하나의 실수도 없이 찾아내었다“ 라고 보도하였다.
그는 소련 정부로부터 중요한 일거리를 위탁받았다: 금광을 찾는 일을. 남아프리카 공화국 다음으로 소련은 귀금속 광물이 풍부한 나라이다. 그는 수많은 금광을 발견할 수 있었고 기감봉을 사용하여 광산을 개발하는 것이 경제성이 있는가를 조사하였다. 한군데도 그는 실수를 하지 않았다.
그는 광범위한 경험을 쌓았다. 몇 달 뒤의 기감봉 조사를 한 뒤에는 수량은 물론이고 지하 수맥의 깊이까지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기계를 사용하기도 전에 기감봉을 사용하여 광맥의 금 함유량까지도 정확히 알아내었다. 기존의 방법으로 지질학적 조사를 시행할 경우 얼마나 경비와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지, 소련의 과학자들은 물질주의를 설왕설래하면서 까지 신비주의적인 방법인 기감봉을 사용한 방법을 선호하는 가를 이해할 수 있다.
기존의 광산 개발은 대규모의 시험 시추를 하고 비싼 분석을 시행하여 광맥의 크기와 채굴의 경제성을 정확히 예상한다. 이 방법은 몇 달이 걸리고, 결과는 종종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에 반하여 기감 능력자는 한 번 또는 여러 번 특정한 장소에 가서 자신의 기감으로 매장 광맥의 위치와 양, 그리고 종종 질을 측정한다. 소련의 권력자들은 기감학의 방법에 대하여 회의주의자들의 논쟁에 휘말리지는 않는다.
손안에 쥘 수 있는 결과가 이론보다 더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드나레프 씨는 “과학은 지금까지 수많은 회의주의자에 대하여 우리를 방어하지 못했다. 성실한 생 물리학적인 방법에 정통하는 것과 병행하여 기감 능력자는 기본적인 지질학적인 지식을 알아야만 한다. 기감 능력자의 일이 단순해 보여도 기감 능력자의 필요 조건은 시계 제조자의 정밀함과 비교할 수 있다.”
동서양의 힘 겨루기는 기감학 분야에서도 실제하고 있다. 미국인들은 현명하게도 오래 전부터 민간 분야에서 필요하면 기감 능력을 가진 사람을 쓰고 있다. 미국에서는 민간 분야에서 무엇보다도 심정 개발에 기감 능력자를 부를 동안에, 놀랍게도 그러나 기대하지 않았는 데도, 기감학에 대하여 첫 번째로 한 기관이 관심을 갖게 되었다. 미군(美軍)에서.
거의 러시아인들과 같은 시기에 공식적으로 미국인들이 기감학 현상에 대하여 믿음을 가졌다. 베트남 전쟁 동안인 1966 년 미 국방부 장관 맥나마라(Robert McNamara) 씨는 어떤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미 해병대가 베트콩들이 정글 지하에 건설해 놓은 지하 은신처를 찾아내는 해결할 수 없는 임무를 부여받은 것이었다. 베트콩들이 숲 속이나, 대부분 마을 근처에 숨을 곳을 만들어 놓았고, 베트콩들은 미군 순찰대의 가까이 있는 곳에 은신처를 만들었다.
미군으로서는 베트콩들이 건설해 놓은 복잡한 지하 도피로를 잡초 가득한 정글에서 찾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버지니아 주에서 직업적인 기감 전문가로 이름을 날린 토지 측량사인 마타시아(Louis Matacia) 씨가 이 문제에 대하여 들었다. 그에게는 지하 통로를 기감 조사하여 발견하기란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옷걸이를 잘라서 L 기감봉을 만들어 사용하고, 필요 없으면 버리면 되었다. 무엇이 여기서 더 필요하겠는가?
버지니아주의 콴티코(Quantico)에 있는 미 해병 발전 교육 센터에서 그의 능력을 시험하였다. 그를 해병 상륙 부대의 교육 센터에 초청하여 2 개의 L 형의 금속 기감봉을 사용하여 땅위에서 걸어가면서 어느 건물로 통하는 수도관을 찾아내었다. 해병대 장교들은 감명을 받았다.
그의 기감봉을 더 시험하기로 결정하였다. 콴티코 훈련소에서 전술 훈련을 하는 훈련용 마을에서 그를 더 시험하였다. 이 모형 마을은 베트남 마을 그대로 볏짚으로 만든 집, 벼를 재배하는 논, 콩밭, 가축 우리, 그리고 시냇물에 배도 떠다니고 있었다. 이 마을에는 군인들의 발이 빠지면 발을 다치는 구덩이도 만들어 놓아서 미군들이 작전 중에 자신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치명적인 구덩이에는 독이 묻은 금속으로 만든 창을 묻어 놓았다. 그리고 수류탄을 묶어 놓은 구덩이 등의 전쟁을 위한 비인간적인 무기도 있었다. 관심의 초점은 지하 터널과 보이지 않게 위장한 터널 입구, 통풍구, 연결 터널 등이었다. 그는 이 인공 마을의 복잡한 지하 터널들을 기감봉으로 찾아내야만 했다.
장교들은 그에게 L 형의 기감봉을 양손에 하나씩 2 개를 손에 잡게 하고, 기감봉의 끝은 앞으로 향하 게 하고 기감 을 하면서 이 곳 저곳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가 어느 길에서 멈춰 섰다. 기감봉의 두 끝이 빙글 돌아가면서 어느 두 집을 가리켰다. 그는 이곳에 터널 이 지나간다고 예측을 하였다.
그와 동행한 장교들은 고개를 끄덕 였다. 그러나 어떻게 그가 터널을 찾았는 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 다. 그는 장교들에게 터널이 깊어 지고, 얕아지고, 두 갈래로 갈라지 고 또는 터널이 넓어지고 하는 기 감을 설명하였다. 한 해병 대위가 그의 기감 조사가 정확하다는 것 을 확인시켜 주었다. 30 분도 지 나지 않아서 마을을 따라 기감 산책을 나가서 터널 시스템을 기감하여 지도에 표시하였다.
더 이상 질문이 없었고, 장교들은 감명을 받았다. 이날의 마타치아 씨의 기감 조사는 대성공이었다. 미 해병대는 기감 테스트 프로그램을 시행하기를 권고 받았고, 그 결과로서 기감 능력이 있는 군인들을 선발하게 된다. 사이공에 있는 군사령부는 전쟁 지역에 기감학이 실제적으로 사용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결과에 의하면 베트콩의 터널 시스템뿐만이 아니라 무기를 숨겨 둔 장소나 음식물을 숨겨 놓은 곳까지 기감 조사가 가능하였다고 한다. 또한 언론에서도 새로 배치된 부대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되었다.
아주 뛰어난 기감 능력을 가진 장교인 하드액커(Nelson Hardacker) 소령은 뉴욕 타임지의 편집자인 볼드윈(Hanson Baldwin)씨의 입회 하에 동료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 주었다. 소령은 어느 터널을 기감하고 터널의 방향과 경사까지도 말하였다. 회의적인 기자에게 자신의 기감 조사를 확인시키기 위하여 기자에게 기감봉을 쥐어 보게 하였다. 회의적인 기자는 몇 분이 지나지 않아 그가 전혀 모르는 지하 통로의 존재를 기감하게 되었다.
볼드윈 씨는 군에서 기감봉이 어떻게 사용되고 어디서부터 왔는 지를 알아보고 마타치아 씨를 만나게 된다. 뉴욕 타임즈 지와의 인터뷰에서 버지니아 출신의 기감 능력자인 마타치아 씨는 기감학적인 방법이 펜타곤(국방성)에서도 조사를 하여 좋은 결과를 얻었으나 공식적으로 군 프로그램에 채택되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그 이유는 국방성의 해군 장교들은 의심 없이 기감봉의 성과에 대하여 보고를 받았으나, 그러나 과학 전문가와 마찬가지로 왜 그리고 어떻게에 대해서는 말할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군사 전문가들이 몰랐던 사실은 이미 19 세기말에 군사적인 기감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었던 장교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황제와 헝가리 왕의(k. u k.-kaiserlich und koeniglich) 군대의 장교인 바이흘(Oberst Beichl) 대령이었다."
미해병들이 L형 기감봉으로 기감 교육을 받고 있다.
기감봉으로 기감 조사하고 있는 루이 마타시아씨
1967. 03.13. 오버저버지의 기감봉에 대한 기사
사진 출처:(Christopher Bird, Wuenschelrute, Moos. 3.Auflage. Muenchen, 1987, p.153-1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