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15. 10:16ㆍ땅의 기감 조사/동래정씨 시조묘 정묘 기감 조사
동래정씨 시조묘 정묘 기감 조사
2009년 2월 9일 , 월요일, 14:30 부터 15:30 까지 약 1시간에 걸쳐 필자의 시조묘(始祖墓)인 정묘(鄭墓)를 기감 조사하였다. 오전 내내 반가운 비가 왔다. 오후가 되면서 빗줄기가 점차 약해지면서 필자가 정묘에 도착하기 전에 비가 그치고 흐린 날씨에 바람이 약간 불었다.
천기(天氣)의 기감 강도는 100%, 보통 정도로 기감되었다.
필자는 동래정씨(東萊鄭氏) 33세로 시조묘의 기감 조사를 행하는 것에 대해 무한한 자부심을 느낀다. 왜냐하면 독일에서 라디에스테지-기감학(氣感學
)을 배웠고, 그 학문의 관점으로 시조묘의 기감 조사를 행하면서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한 시작은 바로 이곳 시조묘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육체는 부모에게서 받았고, 나의 미세 에너지는 부모의 미세 에너지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미세 에너지, 그리고 윗대 선조들의 미세 에너지, 그리고 선조들이 묻힌 묘자리의 미세 에너지, 시조의 묘자리의 미세 에너지 그리고 선조들의 영혼의 미세 에너지로부터 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지금의 나는 육체와 여러 층을 가진 미세 에너지로 구성되어 있고, 그 시작은 결국은 시조의 묘자리의 미세 에너지로부터 나에게 오는 미세 에너지를 알아보는 것이 순서가 아닌가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예전부터 필자의 집안 어른들로부터 구전을 통해서 그리고 여러 풍수가들의 책을 통해서 동래정씨가 발복한 것이 바로 천하의 명당인 정묘 때문이라고 들어왔다. 그러기에 필자의 기감 조사는 과거의 학문인 풍수와 현대의 학문인 라디에스테지-기감학의 만남이라는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우리의 선조들은 풍수의 체계로 세상을 보아왔고, 필자는 유럽의 학문인 라디에스테지-기감학의 관점으로 정묘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두 학문의 관점의 차이가 무엇인가가 아니고, 얼마나 기감학적인 방법론과 풍수가 공통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고 싶은 것이었다. 어떤 관점으로 이 세상을 보았느냐? 가 아닌 무엇을 보았느냐 하는 물음에 답을 주고 싶은 것이다.
"죽은 사람의 유골이 받은 기가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옮겨질 수 있는가는 설명하기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풍수에서는 이것을 친자감응(親子感應) 혹은 동기감응(同氣感應)이라고 부른다. 부모나 조상의 유해가 받은 기는 자식과 후손에게 전달된다는 얘기다.
살아있는 사람은 항상 몸을 움직이고 머리로는 생각을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가 필요하다. 음식과 호흡을 통하여 필요한 기를 흡수하지만 천기(天氣)와 지기(地氣)도 여러 경로를 통하여 인기(人氣)로 화한다.
그래서 살아있는 사람이 받은 기는 그대로 그 사람 것이 된다. 그러나 죽은 사람의 뼈가 땅속에 묻혀 받는 지기는 자기 자신이 쓸 곳이 없어 자연히 자기의 분신인 자식에게 그 기를 보낼 수 밖에 없다는 논리이다.
또 이런 비유를 하기도 한다. 나무는 그 뿌리가 좋은 땅을 차지해서 자양분을 충분히 흡수해야 줄기와 잎이 무성해지는 법이라거나, 아무리 엄동설한 같은 찬바람이 휘몰아쳐도 입춘지나 우수가 되어 봄 기운이 서리게 되면 꽁꽁 언 땅속에 묻혀있던 씨앗이 움 틔울 채비를 차리는 것 처럼, 기운과 기미(機微)는 그 윗대에 물려받은 자연의 법칙을 그대로 물려받는다는 뜻이다.
생명체뿐만 아니다. 당 현종 때 궁궐에 매달려 있는 구리종이 바람도 없는 데 제 스스로 뎅그렁 울렸다. 훗날 알아보니 종을 만든 구리를 캐낸 멀리 있는 구리 광산에 그 시간에 지진이 나서 광산 전체가 울렸다는 것이다. 쇠붙이까지도 제 근본을 이같이 따르는데 하물며 사람에 이르러서야 더 말해 무엇하랴 하는 예증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으로 친자감응론을 납득할 현대인은 별로 없을 것이다. 서구의 과학적 방법으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그렇다고 있는 사실을 설명할 수 없다고 하여, 그 자체가 없는 일이라 할 수는 없다. 도안(道眼)의 경지에 이른 참된 풍수 지관은 어떤 무덤을 보면 그 무덤의 자손의 운세를 알아 맞춘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할 수 없다고, 있는 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현대 물리학도 추정적(stochastic)이거나 확률론적(probabilistic)인 사실을 운위한다. 세상에 확정적으로 설명해낼 수 있는 일이란 별로 많지 않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풍수의 동기감응론도 인간의 이해 범위 안으로 끌어 들일 수 있다."
(출처: 최창조, 좋은 땅이란 어디를 말함인가, 한국 풍수의 이론과 실제, 서해문집, 1990, 서울, p.179-180)
“부산시 부산진구 양정동에 있는 정문도(鄭文道)의 묘터 또한 경남 일대의 대 명당터 가운데 하나이다. 이 터는 흥미롭고 곡진한 사연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정문도는 본래 고려시대의 아전이었다 한다. 동래부사가 새로 부임해 와서 가까이 모셨는 데, 그 부사는 지리에 밝아서 가까운 산천을 자주 돌아다니곤 하였다. 부사는 화지산을 자주 산책하였는 데, 명혈을 하나 찾아서 마음속으로 몹시 기뻐하였다.
정문도 또한 부사의 속마음을 잘 헤아려서 그 곳을 눈여겨 두고 있었다. 어느 날 부사가 그 명혈을 증험하기 위하여 정문도에게 날 계란을 구해오라고 일렀다. 날 계란을 진혈에 잠시 묻어놓으면 부화하여 병아리가 되는 것은 당시 지리를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 아닌가? 부사는 그로써 진혈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정문도가 이것을 몰랐을 리 없다. 그리하여 정문도는 계책을 꾸몄다. 날계란을 살짝 삶아서 부사에게 가져간 것이다. 부사는 그것도 모르고 삶은 계란을 진혈 속에 묻어 놓았다. 묻은 지 하루 만에 계란을 꺼내 보니 썩어 있지 않은가?
부사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는 그곳이 혈이 아니라고 단정하고, 후일 관직에 체임되어 개경(개성)으로 올라가 버리고 말았다. 정문도는 그 자리를 자신만이 알고서 세월을 보낸 후 관직을 떠나 졸하게 되었다. 아들에게 자신의 신후지지(身後之地)를 알려주고, 그 자리에 묻히니 바로 오늘의 그 자리이다.
아들 목(穆)이 장례를 치르고 났는 데, 전대미문의 기괴한 일이 일어났다. 장례를 치른 후 밤을 새고 나니, 아버지의 관이 튀어나온 것이다.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식구들은 이일을 불문에 붙이고 다시 그 자리에 잘 묻어 흙을 다져 놓았다. 그러나 관은 또 다시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이렇게 하기를 3 번이나 하니, 정목(鄭穆)은 옛날의 동래부사를 찾아 자초지종을 밝히고 도움을 구하기로 하였다. 그러던 중에 이상한 일이 또 일어났다. 이 혈의 안산(案山)인 영도의 앞바다 가운데에 우뚝 솟은 암석이 벼락을 맞아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것이었다.
튀어나오는 관!
가라앉는 바다 가운데의 바위!
정문도의 장례를 치르고 난 뒤에 일어난 이상한 현상이었다.
전직 동래부사는 정목의 방문을 받고 자초지종을 들었다. 자신의 선친이 계란을 가지고 속인 이야기, 관이 튀어 나와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이야기, 영도 앞바다 가운데의 바위가 가라앉은 이야기 등을 정목은 숨김없이 말했다.
그 부사는 처음에는 자신을 속인 소행이 괘씸하여 몹시 화를 냈지만, 바위가 가라앉은 이야기를 듣고는 감탄해마지 않았다. ‘그 혈은 진혈 중의 진혈인 데, 임자가 아닌 자가 들어갔으니 자연히 관이 튀어나온 것이다.
그리고 그 혈은 영도 앞바다의 바위 때문에 성국(成局)이 이루어지지 못한 흠이 있었는 데, 자네의 말을 들으니 이제 하늘이 임자를 정해준 것 같으이, 조상님들이 얼마나 적덕(積德)을 했기로 하늘이 그런 명당을 내리셨을까? 적덕지가(積德之家)에 필유여경(必有餘慶)이라더니 그 말이 맞음일세. 그러나 선친의 관을 그대로 또 넣으면 안 될걸 세, 황금으로 관을 입히고 벼슬을 제수하여 지기(地氣)로 하여금 거부하지 못하도록 제압하도록 하시게.’
정목은 크게 사례하고 여러 날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건만 뾰쪽한 수가 없었다. 집안 형편도 넉넉치 못한데 무슨 황금이며 벼슬은 또 무엇인가? 하는 수 없이 누런 보릿단을 멍석처럼 엮어 짠 다음 그로써 관을 싸고, 기나긴 신위를 가진 벼슬을 제수하여 선친의 관을 다시 묻었다. 그런데 그 뒤로부터는 관이 다시 튀어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명당에 들어간 정문도의 체백은 조화를 일으켜서 후손에게 영향을 주기 시작하니, 고려와 조선에 걸쳐 무수한 정승, 판서, 학자를 배출케 했던 것이다.“
(터 상, 손석우 저, 도서출판 답게, 초판 5쇄, 1994. 1. 15, 서울, p.106-109)
“동래정씨(東萊鄭氏)는 신라(新羅)의 전신(全身)인 사로(斯盧, 서라벌)의 6촌(村) 가운데 취산 진지 촌장(嘴山珍支村長) 지백호(智白虎)의 원손(遠孫)으로 전하는 회문(繪文, 신라(新羅)때 안일 호장(安逸戶長을 지냄))을 원조(遠祖)로 하고 있으나, 문헌(文獻)이 실전(失傳)되어 그의 후손(後孫) 지원(之遠)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누대(累代)에 걸쳐 정착 세거(定着世居)해온 거칠 소부(居漆少部, 지금의 부산 동래(釜山 東萊))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家門)을 대표(代表)하는 인물(人物)로는 지원(之遠)의 아들 문도(文道)가 고려(高麗)에서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지냈으며, 그의 묘(墓)가 부산(釜山)의 화지산(華池山)에 있는 데, 묘(墓)에 얽힌 재미난 전설(傳說)이 지금껏 전해진다.
그가 죽어 아들이 지금의 묘터에 아버지의 시신(屍身)을 묻고 돌아오자 그날 밤 도깨비들이 나타나 “대인(大人)이 들어올 자리에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 하며 묘(墓)를 파헤쳐 버려 이튿날 이를 본 아들이 영문도 모른 채 아버지의 시신(屍身)을 다시 모셨지만 결과(結果)는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묻고 파헤치는 실랑이가 몇 차례 계속(繼續)되던 끝에 이를 이상히 여긴 아들이 해박(該博)한 마을 노인(老人)을 찾아가 기묘(奇妙)한 사실(事實)을 이야기하자, 노인(老人)은 그 자리는 임금이나 정승(政丞)이 묻힐 자리이기 때문이라며 금(金)으로 관(棺)을 만들어 묻으면 되나 그럴 수 없으니 관(棺)을 보릿짚으로 싸서 묻으면 도깨비들이 속아 넘어갈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노인(老人)이 시킨 대로 하고 나서 몰래 숨어서 봤더니 도깨비들이 그날 밤 다시 나타나서 “과연 주인(主人)이 들어 왔구나” 라고 하며 되돌아갔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인지 그후 동래정씨(東萊鄭氏)는 십대(十代)에 걸쳐 사백년(四百年)이란 긴 세월(歲月) 동안 가문(家門)의 번영(繁榮)을 누려 명문거족(名門巨族)의 긍지(矜持)를 살렸다.“
(동래정씨세보, 부천족보도서관 http://jokbo.re.kr/book/index.html?fnkey=11391073&fn=1139&sn=전체&vcode=, NAVER 검색)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정문도는 읍에 속한 아전이었는데, 세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고 묘는 현의 서쪽 7리에 있다’라고 하였다. 정문도는 고려 현종 때 동평현의 안일호장으로 지금의 양정동 북쪽인 흑암리에 살고 있었는데 늙어 호장직에서 물러나 있을 때, 문득 뿔피리 소리를 듣고 마당에 엎드려 절하고는 손수 가꾼 정근을 길가에 쌓아 놓고 굶주린 행인들을 구휼하니 사람들이 감동하여 진정사賑精詞를 지었는데,
이후로 후손이 다 현달하였다고 한다. 동래정씨 가문의 번창은 정문도의 묘지가 천하의 명당에 자리잡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정묘는 명혈로 널리 알려져 조선초 정사鄭賜의 묘와 더불어 양대 정묘鄭墓로 일컬어지며 풍수연구자들의 관심을 모으고 음택 풍수연구서에 빠지지 않고 언급되기도 한다.
정묘의 명혈에 관련되어 흥미로운 전설이 전해온다. 정목의 장인이 되는 고익공은 풍수에 일가견이 있었던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는 화지산의 풍수를 볼 때마다 ‘좋기는 한데…’라고 하고는 뒷말을 잇지 않았다. 그 후 정문도가 죽자 정목은 화지산 지금의 자리에 아버지 묘소를 썼다. 그런데 다음날 아우와 함께 가보니 누군가 묘소를 파헤쳐 목관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형제는 다시 관을 묻고 감시하였는데, 밤이 깊어 삼경에 이르자 도깨비들이 나타나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이따위 목관을 묻는가. 적어도 금관 정도는 묻어야지.‘하면서 묘를 파헤쳐버리고 사라졌다. 형제는 금관을 어떻게 마련하나 하며 근심하고 있는데 한 백발노인이 나타나 ’도깨비 눈에는 보릿짚이 금빛으로 보이니 보릿짚으로 목관을 싸면 다시는 묘를 파헤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형제는 보릿짚으로 목관을 싸서 묻고는 다시 지켜보았는데, 도깨비들이 나타나서 또 무덤을 파헤치더니 달빛에 비치는 보릿짚으로 싼 목관을 보고는 ’금관이로구나. 이제 됐다. 어서 가자.‘하고 사라졌다. 그 이후로 다시는 도깨비가 나타나 묘를 파헤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묘소를 쓴 그 해 여름 어느날 뇌성벽력이 천지를 진동하더니 황령산 괴시암의 바위를 산산조각으로 부셔버렸다. 정목은 이런 일들이 모두 고익공이 ‘좋기는 한데…’라고 말을 잇지 못한 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개경에 있는 고익공을 찾아갔다. 그가 부친의 묘를 화지산에 모셨다고 말하니 고익공은 깜짝 놀라면서 대뜸 그를 집에서 내쫓으려 하였다.
이에 정목이 묘를 쓰고 난후 일어났던 일들을 소상히 밝히니 고익공은 비로소 안도를 하면서 ‘황령산의 괴시암이 깨어졌으니 이제 그 묘소와 동래정씨 가문의 화근이 사라졌다’라고 하면서 정목을 거두어 관직에 출사하게 하고 자기 딸과 혼인시켰다고 한다. 황령산 정상에 있는 바윗돌이 바로 벼락맞은 괴시암이라 한다.“
(출처-전기웅 http://blog.naver.com/kwjeon2000?Redirect=Log&logNo=130037928617, NAVER 검색)
정묘의 위치
A: 동래정씨 시조 정회문의 단
B: 동래정씨 1 세 정지원의 단
C: 동래정씨 2 세 정문도의 묘
(사진 출처: Google Earth)
정묘 입구의 동래정씨 시조 선산 화지 공원 비석
정묘 입구의 동래정씨 회관, 화지 청소년 문화 회관
미세 에너지 기감 강도는 특별한 설명이 없는한 필자가 사진 찍으면서 서있는 곳의 미세 에너지 기감 강도이다.
미세 에너지의 기감 강도는 수맥의 기감 테스트를 참조하라.
정묘 입구 길건너 미세 에너지 기감 강도 +50%
정묘 입구 미세 에너지 기감 강도 +70%
정묘 입구 미세 에너지 기감 강도 +80%
정묘 입구문 현경문 앞 미세 에너지 기감 강도 +90%
현경문 앞 미세 에너지 기감 강도 +95%
현경문 앞 미세 에너지 기감 강도 +100%
현경문을 지나 오르막 길의 미세 에너지 기감 강도 +105%
현경문을 지나 오르막 길의 미세 에너지 기감 강도 +110%
추원사 입구 마당 미세 에너지 기감 강도 +125%
추원사앞 추원사기 미세 에너지 기감 강도 +130%
동래정씨 2 세 정문도의 묘소 기감(정묘의 위치의 C)
묘소 정면의 아래의 미세 에너지 기감 강도 +60%
묘소 정면 2단 아래의 미세 에너지 기감 강도 +95%
묘소 정면 1단 아래의 미세 에너지 기감 강도 +150%
묘소 정면 석제단 앞의 미세 에너지 기감 강도 +195%
묘소 석제단의 미세 에너지 기감 강도 +200%
정면에서 본 묘소 미세 에너지 기감 강도 +300%
묘소 뒤 미세 에너지 기감 강도 +100%
묘소 먼 뒷편의 미세 에너지 기감 강도 +70%
묘소를 정면에서 보았을 때 오른쪽 편의 미세 에너지 기감 강도 +70%
묘소를 정면에서 보았을 때 왼쪽 편의 미세 에너지 기감 강도 +70%
미세 에너지 기감 강도 +300% 위에서의 필자
필자는 미세 에너지 기감 강도 +300%를 필설로 표현할 수 없으나, 감히 표현한다면 편안하다, 행복하다, 좋다, 기가 충만해진다, 충전된다 등의 언어로 표현할 수 밖에 없다.
정말로 좋았다.
모든 근심 걱정이 다 물러가고, 머리는 맑고 육체는 이완되고 편안해지면서 아! 이곳이 지금 천국이구나 라고 생각되었다.
선조의 묘소에서 발한 미세 에너지가 나의 영혼에 전달이 되어 나는 태어났고, 그리고 그 동안 이 미세 에너지를 받으면서 살아왔구나 하는 감사와 마음의 편안함, 그리고 이 곳을 떠나기 싫고, 여기서 영원히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300% 미세 에너지 자리위의 필자의 미세 에너지 그림
필자의 기감 경험에 의하면 기감 강도 200% 이상되는 미세 에너지 포인트(명당)에서는 하늘에서 땅쪽으로 미세 에너지가 통하는 것으로 기감이 되는 천기가 워낙 강하기 때문에, 북에서 남으로 지역에 따라 조금씩 편향되는 지기의 흐름이 기감되지 않는다. 천기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지기가 미세 에너지 포인트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으로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정묘의 300% 기감 강도의 미세 에너지 포인트에서도 강한 천기만 기감되었다. 지역에 따라 약간씩 편향되는 남북 방향의 지기를 기감할 수 없었다.
그리고 기감 강도의 %가 미세 에너지 포인트의 동쪽, 서쪽, 북쪽 방향보다 남쪽에서 높게 나타나는 것은 북에서 남으로의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 지구 자기장에 의해 미세 에너지가 밀려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정묘의 기감 강도도
No Scale
빨강색 300%
주황색 200%
노랑색 150% 이상
녹색 100% 이상
(천기-지기에 대하여서는 지구의 지기 구조, 한국의 지기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