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의 인물/칼 바이흘 대령의 기감 조사

칼 바이흘 대령(Oberst Carl Beichl)

진실한사람1 2022. 10. 8. 14:09

칼 바이흘 대령(Oberst Carl Beichl),

“폐하, 저에게 10 분만 시간을 주십시요.”

 

Mayer-Winklbaur, Biostrahlen, (Orac, Wien, 1986), p.22-24

 

 

"비인 시내에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길은 없지만 바이흘 대령은 자신의 기감봉을 들고서 이 길 저 길을 걸어서 참모 장교의 세밀함을 동원하여, 당시 제국의 수도였던 비인의 모든 온천과 지하 수맥의 위치를 지도에 표시하였다. 그는 비인 분지의 온천을 발견하였고, 그리고 지도에 표시를 한 사람이다.

 

그는 현재의 오버라아(Oberlaa) 온천을 오래 전에 이 온천이 재발견되기 전에 비인의 지도에 기록하였고, 그리고 현재의 링 (Ringstrasse)가의 모양을 만드는 데 참여한 사람이다. 비인의 보건 부분의 시의원인 쉬타허(Alois Stacher) 교수는 1960 년대에 기감학 방면의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는 바이흘 대령이 그 당시에는 오버라아에서 리이싱바하(Liesingbach)쪽으로 방해없이 흐르고 있었던 온천수의 수질을 기감 조사한 결과를 조사하고 있었다. 이 온천수는 수질이 좋았고, 쉬타허 씨는 당시의 시장이었던 스라빅 씨에게 이 비싼 온천수를 그냥 물길 따라 흘러가게 하지 말라고 말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현재의 오버라아 온천 센터를 설립하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

 

바이흘 씨는 오스트리아 군 역사에서 군복의 병과 표시로 기감봉을 달고 자신의 기감 능력을 표시한 첫 장교였다. 그의 군에서의 출세 가도는 19 세기말에 시작되었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합스부르크가의 프란츠 요셉 황제가 눈이 녹을 때 군사 훈련하는 날을 잡았다. 비인 근교인 오타크링(Ottakring)의 가장 높은 지역의 넓은 들판은 땅이 갈라진 곳이 많고, 키 높은 풀과 덤불과 여러 잡초들이 자라고 있었다. 이 벌판은 라데츠키 부대의 남쪽에 위치하여 백여 년 동안 군사 훈련과 빛나는 열병 분열식이 개최되던 곳이었다. 프란츠 요셉 황제는 그 곳에서 가을의 안개 낀 날에 군사 훈련하는 날을 잡았다.

 

새벽 어둠 속에서 황제는 군복을 입고 훈련 장소로 말을 몰았다. 몇 분 뒤에 황제는 자신의 시계를 잃어버리고 주변에서 자신의 시계를 찾고 있는 것을 황제의 부관이 발견하였다. 황제는 귀중한 회중 시계를 분실하였던 것이었다. 이 시계는 군부대와 들판의 중간 지점 어딘 가에서 황제의 주머니에서 미끌어져 나와서 풀 속으로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황제의 부관은 “ 폐하, 바이흘 중위에게 이 문제를 맡겨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말하였다. 바이흘 중위는 그가 속한 연대에서 사랑스러운 망상가로 알려져 있었다. 항상 기감봉을 가지고 다녔고, 쉬는 시간에는 기감봉을 들고 기감 조사를 하여서 모두들 종종 비웃었다. 그러나 그의 동료들은 그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황제의 부관은 바이흘 중위에게 황제의 잃어버린 시계에 대하여 설명을 해주고, 바이흘 중위는 “폐하, 저에게 10 분만 시간을 주십시오(Majestaet, geben Sie mir 10 Minuten!)” 라고 대답을 하게 되었다.

 

바이흘 중위는 자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바이흘 중위는 기감봉을 군복의 상의에서 꺼내었고 , 황제는 놀라는 눈으로 그의 기감봉을 보았다. 그는 황제가 시계를 찾던 곳과 군부대 사이로 걸어갔다. 몇 분 후에 그는 황제의 잃어버린 시계를 찾았다. 프란츠 요셉 황제는 젊은 중위의 손에서 시계를 받아 들고는 “고맙네, 대위(Ich danke Ihnen, Herr Hauptmann!)” 라고 말을 하였다. 그리하여 바이흘 씨의 군에서의 출세가 시작되었다.

 

그는 병과 표시로서 기감봉을 군복에 다는 것을 허락 받았다. 황제의 명령으로 폴란드의 남부 지방인 갈리시아와 유고슬라비아의 산악 지대인 헤르체고비나(Herzegowina)를 여행하여 충분한 지하 수맥을 기감 조사하는 한편, 예민한 기감 능력을 가진 장교들을 양성하였다. 바이흘 씨는 취미로 밤에 혼자서 비인 시내의 온천 지도를 기감봉의 기감을 통하여 작성하였다.

 

그는 동행자 없이 혼자 걸어 다니면서 기감봉을 가지고 기감 조사를 하였다. 그는 기감봉으로 비인의 여러 거리들을 기감 조사하여 기감 조사 결과를 기록하였다. 그가 쓴 글들이 비인의 기감 전문가 폰 사르칠리(Egon von Sarcilly) 씨의 개인 소유로 남아 있다. 그가 쓴 글들은 너무나 작은 글씨의 흘려 쓴 글씨체로 지금까지 누구도 해석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일차 대전 동안은 바이흘 대령은 육군 부대에 물을 조달하는 임무를 맡았고, 두 사람의 기감 능력자를 양성하였다. 무질(Musil) 소령과 레빈 (Lewin) 대위였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첫 유전은 1932 년 바이흘(Beichl) 대령의 수제자인 무질(Musil) 소령이 기감봉을 사용하여 치스터도르프(Zisterdorf)에서 발견하였다. 그 후로 오스트리아는 전체 석유 소비량의 13% 를 자체 개발한 유전에서 조달한다. 바이흘 씨는 두 사람의 후배 장교와 함께 알프스 산지에서 하루 2,000 만 리터의 용출량의 물을 조달하였다.

 

또한 2 차 세계 대전 동안 독일군 사령부에서도 기감 능력자의 현역 복무를 확인해 주고 있다. 특별히 기감 능력이 우수한 기감 능력자는 군인 수첩에 기록이 되었다.

 

 

비인의 건축가인 아르트만(Paul Artmann)씨 같은 사람이 이에 해당한다.

1941 년 그의 특별한 기감 능력이 증명되었다. 그는 사단 참모로 북 노르웨이 지역에 배치되었다. 그가 속한 부대는 물이 부족하여 애를 먹고 있었는 데,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군인이었다. 손에 기감봉을 들고, 걸어서 끝없는 숲을 찾아다녔고, 바위투성이의 산을 조사하는 것은 시간이 많이 소비되는 임무였다.

 

그는 사단장의 허가를 받아 지도를 만들었다. 그는 천천히 비행하는 유 57(Ju 57) 비행기를 타고 기감 조사를 할 생각이었다. 그 자신도 호기심이 생겼다. 그렇지만 기대한 대로 비행하고 있는 공중의 비행기 객실 내에서도 기감봉이 지하 수맥에 반응하여 움직이는 것이 기감 되었다.

 

그의 계획에 따라 비행기는 남에서 북으로 비행하면서 그는 비행기 내에서 기감을 했고, 그의 지도에 수맥의 기감 느낌이 있는 지역을 표시하였다. 지하 수맥의 기감이 있던 곳에는 방향 측정기로 위치를 표시하고 나중에 정확히 다시 지하 수맥을 확인하였다.

 

독일 사단 본부는 그의 기감 결과를 검토하여 우물을 개발하였다. 그가 표시한 자리는 모두 물이 나왔고, 한번도 기감 결과가 틀린 곳이 없이 모든 지역을 공중에서 기감 능력을 사용하여 물을 찾았다. 이 방법은 나중에 러시아의 지질학자들이 이어 받는다."

 

 

칼 바이흘 대령(Der k. und k. Rutengaenger Oberst Carl Beichl)

 

사진 출처: Mayer-Winklbaur, Biostrahlen, (Orac, Wien, 1986), p.23

 

k. und k.는 오스트리아의 황제와 헝가리 왕의(k. u k.- kaiserlich und koeniglich) 라는 뜻이다.

 

 

 

비인의 온천 지도

 

기감 전문가 공병 대령 칼 바이흘 (1910 - 1937) 씨와 기감 전문가 사르실리 에르네스(Sarcilly-Ernes) 씨가 비인 시내의 온천을 기감 조사한 결과를 지도로 그렸다.

 

사진 출처: Mayer-Winklbaur, Biostrahlen, (Orac, Wien, 1986), p.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