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의 기감 조사/안동권씨 시조묘 기감 조사

안동권씨 시조묘 기감 조사

진실한사람1 2022. 10. 18. 09:27

안동권씨 시조묘 기감 조사

 

 

필자는 2009.02.24. 13:00 - 14:00 까지 안동권씨 시조묘를 기감 조사하였다.

 

날씨는 맑았고, 바람은 거의 불지 않았다.

천기는 100%로 보통 정도의 기감 강도로 기감되는 날이었다.

 

 

필자의 조모(祖母)가 안동권씨(安東權氏)로, 안동권씨의 시조묘를 기감 조사하면서 친할머니의 손자 사랑 같은 따뜻함을 느꼈다. 필자는 3형제의 장남으로 친할머니의 사랑을 정말로 많이 받은 사람이다.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시는 친할머니를 생각하면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그리움이 느껴진다. 할머니의 그리움을 안동권씨 시조묘 권태사묘에서 발하는 미세 에너지에서 느끼고 싶었다.

 

 

 

 “태사공(太師公)의 선계(先系)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시조(始祖) 태사공(太師公)의 처음 성은 신라(新羅)의 종성(宗姓)인 김씨(金氏)이다. 종성은 왕실(王室) 성씨를 지칭한 말이고 종실(宗室)이라 쓰기도 한다. 종성이란 말은 종족(宗族)의 성씨로 쓸 때에는 같은 겨레붙이의 성씨, 즉 성씨가 같은 일가붙이를 말하지만 여기에서는 신라의 종성이라 하였기 때문에 국성(國姓), 즉 왕성(王姓)을 말한다.

 

신라의 국성 경주 김씨(慶州金氏) 시조는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수가 많은 것이 김씨인데 고대에 경주와 김해(金海)를 본관(本貫)으로 하는 두 김씨가 있었다. 경주의 김씨는 김알지를 시조로 하여 퍼졌고 김해의 김씨는 가락국(加洛國)의 시조 김수로왕(金首露王)을 시조로 하여 퍼졌는데 지금 우리나라 인구의 태반을 차지하는 김씨는 다 이 두 김씨에서 분적(分籍)되어 독립된 본관을 갖게 된 성씨들이다.

 

그리고 우리 안동권씨는 신라의 종성에서 권씨로 환성(換姓)하였으므로 또한 경주 김씨에서 분적된 것인데, 이를 분적이라고 이르지 않는 것은, 분적이란 그 성은 그대로 두고 본관만 바꾸어 독립할 때에 지칭하는 말이고 성과 본관을 다 바꿀 때는 완전히 타성으로 되어 통혼(通婚)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즉 동성혼(同姓婚)을 안함에 있어 분적을 한 동성끼리는 좀체로 혼인을 안하지만 분적 환성을 한 성씨와는 구애없이 통혼을 하되 외가 성씨에 대해 친근한 정서를 갖는 것처럼 이를 더 선호하면 하였지 배척하지 않았던 것이다.

 

(중략)

 

신라 56왕 가운데 박씨 10왕 석씨 8왕을 뺀 38왕이 김씨인데 그 가운데 한 왕이 우리 권씨의 시조 태사공의 예조(藝祖)라 할 수밖에 없다. 그 가운데 여왕 3위는 후손이 없거나 있더라도 타성이 되었을 터이니 제외하고 남왕 중에도 14왕이 기록상 사왕자(嗣王子)가 없으며 말왕(末王) 경순왕은 태사공과 동시대인이니 제외하여 이들 18왕을 다시 빼면 태사공의 선조가 될 수 있는 임금은 20왕이 되는 셈이다. 김알지가 계림에서 태어난 서기 65년으로부터 태사공이 권씨로 득성(得姓)한 930년까지는 865년이 되고 미추왕의 즉위가 서기 262년이니 그로부터 930년까지는 668년이 된다.

 

사람의 한 세대를 대략 30년으로 계산하면 태사공은 미추왕으로부터는 22∼23세손이 되겠고 김알지의 28∼29세손이 될 것이다. 태사공과 동시대인인 경순왕이 김알지의 28세손이라 하니 대략 태사공도 알지 시조의 30세 이내로 추정해야 옳을 것이다.태사공의 태어나고 돌아간 생몰(生歿) 연대와 그 부친 및 배위(配位)에 관해서는 전하는 기록이 없다. 다만 신라 왕실의 종성(宗姓)으로서 신분이 존귀하며 명망이 커서 당세의 관민(官民)에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영걸이었음을 미루어 알 뿐이다.

 

 

태사공(太師公)의 득성(得姓)

 

태사공은 본래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서 성명이 김행(金幸)이었다. 고려사(高麗史) 에는 성명이 권행(權行)으로 기록되어 나온다. 그러나 이것은 사관(史官)의 착오로 오기(誤記)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세전(世傳)의 기록이나 기타 모든 문적(文籍)에는 다 휘(諱)가 행(幸)으로 나오고 행(行)으로 나온 곳은 고려사 뿐이다. 혹시 태사공이 사성(賜姓)을 받아 성이 김씨에서 권씨로 되면서 휘도 행(幸)에서 행(行)으로 바뀐 것이나 아닌가 의심할 수도 있으나 더 상서롭고 좋은 글자인 행(幸)을 버리고 행(行)을 취했을 이치가 없으니 환성(換姓)이 되면서 휘자(諱字)도 바뀌었을 가능성은 없다.

 

태사공이 덕업(德業)을 쌓고 공훈을 세워 사성(賜姓)과 작위(爵位)를 받은 일은 사서(史書)나 각 집안의 문헌에 반복되어 나오는 것이 수없이 많으나 그 대표적인 것은 동사강목(東史綱目) 의 기록이다. 동사강목은 조선 영조(英祖) 때 안정복(安鼎福)이 아동의 교과용으로 지은 역사책으로 기자(箕子)에서부터 고려 말(高麗末)에 이르기까지의 사적을 송(宋)나라 주자(朱子 : 주희)의 통감강목(通鑑綱目) 을 참고하여 편술한 것이다. 거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경순왕(敬順王) 3년 기축(己丑 : 929)[후당(後唐) 천성(天成 : 明宗 연호) 4년 견훤(甄萱 : 후백제) 38년 12월에 견훤이 고려(高麗 : 신라)의 고창군(古昌郡 : 안동)을 포위하니 고려 임금 건(建 : 왕건)이 스스로 장수가 되어 와 구원하였다. 경순왕 4년 경인(庚寅 : 930)[후당 장흥(長興) 원년 견훤 39년]에 고려 임금 건이 견훤을 고창에서 대파(大破)하니 동방(東方)의 주군(州郡)이 모두 고려에 항복하였다.

 

고려왕이 고창을 구원하러 와 예안진(禮安鎭 : 안동시 예안면)에 머물면서 여러 장수와 의논하기를,"싸워 이롭지 못하면 장차 어찌할 것인가?"하니 대상(大相 : 고려초의 문무관 2품) 공훤(公萱)과 홍유(洪儒)가 말하기를, "불리하면 마땅히 사잇길을 좇아 가야지 죽령(竹嶺)으로 넘어가는 것은 불가하니 반드시 먼저 사잇길을 닦아야 합니다."하였다.

 

장군 유검필(庾黔弼)이 말하기를,"병(兵)이란 흉기(凶器)이고 전쟁은 위태로운 일이니 죽을 마음만이 있고 살 계책이 없은 연후에 가히 승패를 결정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거늘 지금 적 앞에 임하여 싸우지는 않고 먼저 북으로 꺾일 것을 염려함은 어째서입니까? 만약 지금 고창을 급히 구하지 않는다면 3천여의 무리가 손을 맞잡아 읍하여 적을 맞아들일 터이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닙니까. 신(臣)은 진군하여 급히 칠 것을 원합니다."하니 고려왕이 이를 좇았다.

 

병술일(丙戌日)에 고려왕의 군대가 고을의 북쪽 병산(甁山 : 안동시 臥龍面 西枝里)에 이르렀는데 훤(萱)의 군대는 석산(石山)에 있어 상거가 5백보가 되자 드디어 접전하였다. 저물 때까지 격전을 벌였는데 검필(黔弼)이 경병(輕兵)을 이끌고 저수봉(猪首峰)에서 분격해 치니 훤이 패해 달아나는지라 그 시랑(侍郞) 김악(金渥)을 사로잡고 백제군의 죽은 것이 8천여인이었다.

 

고려왕이 고창에 입성하여 검필에게 말하기를, "오늘의 승첩(勝捷)은 경(卿)의 공이다."하였다. 견훤은 장수를 보내 순주(順州 : 풍산)를 쳐 침략하고 인호(人戶)를 약탈해 가지고 갔다. 고려왕이 곧 순주로 행차하여 성을 수복(修復)하고 주(州)를 격하하여 하지현(下枝縣)을 삼고 원봉(元奉 : 성주)을 잡았는데 [백제에 항복했으나] 전에 세운 공이 있으므로 용서하였다.

 

고창성주(古昌城主) 김선평(金宣平)을 대광(大匡 : 고려 초기 문무관 1품)으로 삼고 김행(金幸)과 장길(張吉 : 장정필)을 대상(大相)으로 삼았으며 군을 승격하여 안동부(安東府)로 하였다. 이에 영안(永安 : 풍산) 하곡(河谷 : 안동시 임하면) 직명(直明 : 안동시 일직면) 송생(松生 : 청송) 등 30여 고을이 고려에 항복하였다. 고려는 이때 병력이 점점 강해지고 나라가 동쪽으로 넓혀져 바다에 연한 주군(州郡)과 부락이 모두 고려에 항복하니 명주(溟州 : 강릉)에서부터 흥례부(興禮府 : 울산)에 이르기까지 총1백10개 성이었다.

 

김행(金幸)이란 사람은 나라의 종성(宗姓 : 왕실 성씨)인데 견훤이 임금을 시해(弑害)하였다는 말을 듣고 무리와 모의하기를, "훤(萱 : 견훤)은 의리상 함께 하늘을 이고 살 수가 없으니 어찌 왕공(王公 : 왕건)에게 귀부(歸附)하여 우리의 수치를 설해(雪解)치 않으리오."하고 드디어 고려에 항복하니 고려왕이 기뻐하며 이르기를,"행(幸)은 능히 기미(幾微)에 밝고 권도(權道)에 통달하였다."하고 권(權)씨로 성을 하사하였다.“

 (출처: http://www.andongkwon.or.kr/daejonghoe/taesagong.html)

 

 

 

"중국 금(金)나라 시조는 안동 권씨일 것

 

금태조 가계도 추적 ‘금조사연구’ 펴낸 금감원 윤명수 수석조사역

 

여진족의 국가로 알려진 금(金·1115∼1234)의 시조가 안동 권씨의 시조인 권행의 후손일 가능성이 높다 는 주장이 나왔다.

 

 금융감독원 윤명수(51) 수석조사역은 최근 중국의 정통역사서 25사 중 국내에 번역되지 않았던 ‘금사(金史)’의 주요 내용을 번역한 ‘금사’와 금태조 완안민(아골타)의 가계계승 문제를 추적한 ‘금조사연구’를 함께 펴내면서 이같이 주장했다.

 

금사에는 금태조가 고려에서 건너온 함보(函普)를 비롯한 3형제의 후손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금을 계승한 청(후금)의 건륭제 때 집필된 ‘흠정만주원류고’에는 금국(金國)의 명칭이 신라왕성 김(金)씨에서 비롯했다는 내용도 나온다.  금과 신라의 연관성을 보여 주는 근거는 또 있다. 청 황실의 만주어 성 ‘아이신줴뤄’ 중 씨족을 가리키는 아이신은 금(金)을 뜻한다.  이는 아이신줴뤄를 한자로 가차한 애신각라(愛新覺羅)에는 ‘신라(新羅)를 사랑하고, 기억하자’는 뜻이 담겼다는 가설을 뒷받침한다.

 

조선시대에 나온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도 금의 시조가 김행(金幸)의 아들 또는 금준(今俊)이라는 설이 기록돼 있다. 김씨는 본디 금씨로 발음됐는데 이(李)씨를 왕조로 한 조선조가 들어서면서 ‘금이 나무를 이긴다(金克木)’는 오행설의 영향으로 금을 김으로 발음했다는 주장에 입각하면 금준은 곧 김준일 수 있다.  이를 근거로 함보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로 고려에 귀순을 거부했던 마의태자이거나 그 후손일 가능성이 오랫동안 제기됐다.

윤 씨는 이를 추적하던 중 조선 인조 때 문신 김세렴이 남긴 ‘동명해사록’에서 “금나라의 시조는 경순왕의 외손이자 권행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다”라는 기록을 찾아냈다.

 

권행은 본디 경주 김씨로 신라 고창(古昌·경북 안동시)의 수령이었다.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 경애왕을 핍박해 자살하게 한 데 분개해 고려를 도와 고창에서 후백제군을 격퇴한 공로로 고려 태조 왕건에게서 권씨를 하사받아 안동 권씨의 시조가 됐다. 윤 씨는 이를 바탕으로 ‘함보의 신라/고려인 부친=김행=권행’으로 수수께끼가 풀렸다고 주장했다.

 

권행은 고려통일 이후 아부공신(亞父功臣)에 책록되고, 정1품 태사(太師)의 벼슬을 받았다. 공교롭게도 고려가 금나라 수립 전 여진족 추장들에게 관례적으로 내린 관직이 태사였다. 결론적으로 함보는 경순왕의 사위인 권행의 세 아들 중 한 명이며 마의태자와 신라 부활운동을 펼치다 마의태자가 숨진 뒤 만주로 진입해 여진족의 일부인 완안부족의 추장이 됐다는 것이 윤 씨의 주장이다.

 

 문신 김세렴의 부인이 권행의 맏아들 권인행의 아내와 같은 양천 허씨인 점, 마의태자가 웅거했다는 설악산 권금성이 권장군과 김장군이 쌓은 성이라는 전설, 1011년 여진의 함선 100여 척이 안동 인근 경주 지역에 출몰했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는 것. 그러나 안동 권씨 족보에는 권행의 후손이 권인행 한 명만 등장하는 등 아직도 풀려야 할 의문점은 남아 있다.

 

일찍부터 만주사에 관심이 깊어 만주어를 독학했다는 윤 씨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자극을 받아 2004년부터 주말을 도서관에서 보내며 금사의 번역에 매달리는 한편 휴가 때는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현지 조사를 했다.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왕씨의 나라라면 금·청은 신라를 계승한 김씨의 나라로 봐야 합니다. 이 때문에 상하이 임정의 역사교재였던 ‘신단민사(新檀民史)’나 일제강점기 사학자 신태윤의 ‘배달조선 정사’도 발해-요-금-청의 역사를 우리 역사에 포함시켰던 것입니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항하기 위해선 중국사에 포함될 수 없는 요-금-청사를 한국사의 방계로 포함시키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출처: 동아일보   2007-02-28,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안동권씨 시조묘의 위치

 

 

안동권씨 시조묘의 주소는 경북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 393번지이다.

 

 

사진 출처: NAVER 지도

 

 

 

사진 출처: Yahoo 위성 지도

 

 

A의 위치가 안동권씨 시조묘이다. 

 

B는 안동권씨 능동제사이다. 

  

 

 

 

능동제사 앞 미세 에너지 기감 강도 80%

 

 

 

 

시조묘 입구 포지석 미세 에너지 기감 강도 70%

 

 

 

 

시조묘로 올라가는 길의 미세 에너지 기감 강도 80%

 

 

 

 

시조묘 근처의 미세 에너지 기감 강도 90%

 

 

 

 

 

시조묘와 시조묘소연혁 표지석이 보이는 위치의 미세 에너지 기감 강도 100%

 

 

 

 

시조묘소연혁의 미세 에너지 기감 강도 110%

 

 

 

 

시조묘 정면 먼 위치의 미세 에너지 기감 강도 100%

 

 

 

 

 

 

시조묘 정면 2단 아래의 미세 에너지 기감 강도 110%

 

 

 

 

시조묘 1단 아래 정면의 미세 에너지 기감 강도 140%

 

 

 

 

시조묘 1단 아래 좌측의 미세 에너지 기감 강도 140%

 

 

 

 

시조묘 1단 아래 우측의 미세 에너지 기감 강도 120%

 

 

 

 

시조묘 근접 중앙의 미세 에너지 기감 강도 150%

 

 

 

 

시조묘 근접 좌측의 미세 에너지 기감 강도 150%

 

 

 

 

시조묘 근접 우측의 미세 에너지 기감 강도 140%

 

 

 

 

시조묘 제단의  에너지 기감 강도 150%

 

 

 

 

시조묘 정면의 미세 에너지 기감 강도 190%

 

 

 

 

시조묘 좌측의 미세 에너지 기감 강도 190%

 

 

 

 

시조묘 우측의 미세 에너지 기감 강도 190%

 

 

 

 

시조묘 가까운 뒤편 중앙의 미세 에너지 기감 강도 140%

 

 

 

시조묘 가까운 뒤편 좌측의 미세 에너지 기감 강도 140%

 

 

 

 

 

시조묘 가까운 뒤편 우측의 미세 에너지 기감 강도 140%

 

 

 

 

시조묘 먼 뒤편 중앙의 미세 에너지 기감 강도 110%

 

 

 

 

시조묘 먼 뒤편 좌측의 미세 에너지 기감 강도 100%

 

 

 

 

 

시조묘 먼 뒤편 우측의 미세 에너지 기감 강도 120%

 

 

 

 

 

시조묘의 방향  -자북 방향이 아닌 남남서쪽을 향하고 있다

 

 

 

 

미세 에너지 기감 강도  190%에 서있는 필자

-따뜻하고 편안하고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시조묘 아래 방향으로 2개의 묘가 더 있었다.

 

 

 

 

시조묘 바로 아래 묘의 미세 에너지 기감 강도 140%

 

 

 

 

 

가장 아래 쪽에 있는 묘의 미세 에너지 기감 강도 100%

 

 

 

 

 

안동권씨 시조묘는 미세 에너지 기감 강도 190% 되는 정확한 위치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옛날 누구인지 모르지만 미세 에너지 기감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안동권씨 시조묘를 의도적으로 좋은 자리에 자리잡아 주었다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기감 강도는 수맥의 유해 지기 기감 테스트 참조)